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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시대 '원더우먼' VS '아이 캔 스피크'




세계를 구한 여자 '원더우먼'


원더 우먼은 아름답고 강하다
그녀의 동기는 순수하다
그녀에게는 그림자도
유령도 없다


자신을 구한 여자 '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의 나옥분 할머니는
훨씬 더 매력적이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두려워 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하는 진상 민원인이다


우리가 극장에서 만나는 주인공들은 압도적으로 남자들이 많다. 달리고, 싸우고, 진실을 파헤치고, 정의를 실현하는 터프하고 유머러스하고 휴머니티 넘치는 남성주인공들의 시대에, 요즈음 보석같이 빛나는 여자 주인공들을 발견하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전쟁의 불구덩이에서 세계를 구하는 여성히어로 <원더우먼>이 스크린에 자태를 드러냈고, 몸을 사리지 않는 주인공 김옥분의 액션 영화 <악녀>가 칸영화제에 초청되는가하면, 시크하고 강력한 여성 스파이 <아토믹 블론드>는 사이다 액션을 선보이고 있다. 지금 전 국민의 마음 속 깊이 감동의 파장을 일으킨 ‘진상민원인’ 나옥분 할머니의 <아이 캔 스피크>가 노인 또는 여자 주인공의 영화는 흥행하기 어렵다는 공식을 깨고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여자들은 어떻게 그려져 왔는가? 그들은 남성주인공이 욕망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대상, 나약한 희생자, 혹은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들은 가차 없이 처벌받는다. 성적 욕망과 탐욕을 구현하는 악녀들은 죽음을 통해 처단당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고 개과천선해야만 했다. 여성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느냐는 단지 여성캐릭터가 없다거나 지나치게 부차적인 지위라는 지적 이상으로 본질적인 영향력이 있는 문제다.

한 사회의 각종 매체에서 여성이라는 존재가 그려지는 재현의 문제, 그 속에 영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재현매체로서 자리 잡고 있고, 여성재현의 이미지들은 여성의 이데올로기적 지위를 우리 인식의 DNA에 장착시켜 대를 이어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모든 판단을 합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도덕적 판단의 경우에 이미지의 힘은 커서, 판단과 선택의 지점에서 행동을 제약하고 조종하고 제어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성평등 문제는 최근에 가장 활발한 이슈 중의 하나이고, 영화 내에서 재현되는 문제와 더불어 영화 바깥의 환경과 관련한 문제 양측으로 논의와 연구와 실천이 이뤄지고 있다.

1985년 카투니스트 알리슨 벡델에 의해 여성캐릭터에 대한 지표로서 벡델 테스트라는 것이 등장했다. 그 기준은 이러하다. 1.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둘 이상 등장한다 2. 여성들이 서로 이야기를 한다 3. 이야기의 주제가 남자에 대한 것 이외이다.

의외로 많은 영화들이 이 단순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고,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꼭 바람직한 여성이 재현되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도 없다.

또 F Rating, 즉 F등급은 2014년 영국 바스(Bath)영화제에서 개발한 것으로 인터넷영화사이트 imdb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는데, <원더 우먼>은 imdb 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F 등급 영화 1위로 등록돼 있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는 당당히 F등급 1위를 받은 <원더 우먼>의 여성주인공이 썩 탐탁치가 못하다. 여성이 얼마나 주체로 잘 그려지느냐의 단순 테스트 보다는 더 복합적으로 여성 주인공을 그려내는 개별적 방식을 갖고 <원더 우먼>과 <아이 캔 스피크> 두 영화를 비교해 보자.


#주인공이 갖춰야 할 제1조건 ‘능동적 인간’

영화속에서 주인공이 갖춰야 할 제1 조건은 바로 능동적 인간일 것이다. 나라를 구하든, 실종된 아이를 찾아 나서든, 스스로 욕망을 가진 존재, 능동적으로 목적을 쫓는 존재가 주인공이다. 강력한 동기와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태도와 더불어 주인공은 매력적이어야 한다. 매력적인 주인공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주인공은 차마 입 밖으로 말하기는커녕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지만, 늘 등뒤에 올라타고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유령과 같은 존재 말이다.




<원더 우먼>은 아름답고 강하다. 그녀의 동기는 순수하다. 그녀에게는 그림자도, 유령도 없다. 
영화는 전반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원더 우먼>인 다이아나(갤 가돗)가 이상향인 데미스키라에서 전사로 키워지고 우연히 불시착한 조종사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를 만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으로 나가기까지를 그린다. 미스 유니버스 출신 갤 가돗과 각종 프로 스포츠 선수들을 기용하여 여성들의 섬 데미스키라를 이상적인 공간으로 그려낸다. 다이아나는 영웅으로서의 임무를 책과 신화를 통해서 배운다.

수퍼히어로물에서 우리는 영웅이 탄생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 배트맨은 어쩌다가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스파이더맨은 어떻게 사춘기의 치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영웅이 되었는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한 개인 Individual로서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원더우먼은 인간적 그늘이 없다. 아니 심지어 인간이 아니고 반신반인이다. 개인이라기 보다는 집합체의 대표 같은 느낌이다. 성적 호기심도 없다. 책을 통해서 알기는 안다. 그래서 원더 우먼이 하는 고뇌는 자신의 소명인 전쟁의 신 아레스와의 한판 승부에서 이길 지라도 인간에게 내재한 폭력성은 없어지지 않는 것을 알고서, 신의 입장에서 과연 인간을 도와줄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고뇌는 참 사치스럽거나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그녀가 트레버의 희생을 보면서 인간의 편을 들기로 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의 입장에선 대단한 인식의 전환일 지도 모른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몸과 능력을 지녔으나 정신적으로 그늘이 없는 여성히어로. (이에 비하면 아토믹 블론드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영화제작의 굳은 편견 깨



반면 <아이 캔 스피크>의 나옥분 할머니는 훨씬 더 매력적이다. 옥분 할머니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두려워 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하는 진상 민원인이다. 우리는 한참 동안을, 왜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는 데 그리도 집착할까라는 호기심을 간직하면서 할머니의 행동에 무장해제를 하고 동참하게 된다. 이미 할머니의 신발을 신고, 할머니에 쉽게 이입하여 상당한 여정을 함께 하고서야 우리는 옥분 할머니의 그늘을 알게 된다. 그 유령은 어떤 영화의 주인공보다도 정말 지독하고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할머니의 전 생애동안 한 번 제대로 마주보지 못하고 얘기하지 못했지만 늘 등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던 무서운 놈이다.

개인의 경험이자 가족의 굴레가 되고 역사의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막강 파워 유령. <아이 캔 스피크>의 탁월한 점은 처음부터 “이 사람은 희생자야, 연민을 가져야 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주인공으로 쉽게 장벽 없이 이입하고 나중에 진실을 밝힘으로써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게 한 점, 진실을 마지막에 드러냄으로서 행동을 이해하고 인식의 반전을 갖고 왔다는 점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그리면서 고수의 경지를 보여준 점과 더불어 영화제작에서의 굳은 편견을 깨 버렸다. 여자 주인공, 노인 주인공은 안된다는 편견과, 역사적 희생자를 단지 희생자로서 대상화하거나 도덕적으로 성역화하는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난 점은 이 영화의 큰 미덕이다. <원더 우먼>은 세계를 구했지만 옥분 할머니는 스스로를 구했다. 나는 옥분 할머니에게 더 큰 갈채를 보낸다.




▶▶▶김영덕 프로그래머는…
2001년부터 4년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프로그래머, 2005년에는 리얼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2006년에는 제1회 아시안필름마켓을 기획하고 마케팅을 맡았다. 2001년부터 국제공동제작을 비롯한 제작, 수입, 배급 등 다방면의 영화경력을 쌓았고, 2016년 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복귀하여 현재 재직중이다. 영상원, 성균관대, 추계예대에 출강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