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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을 잃고 나서 깨달은 것

시론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습니다. 전날 쉬고 난 뒤라 그런지 유난히 늘어지고 출근이 하기 싫었던 점을 빼면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진료 중에 전자 차트가 좀 버벅거리고 예전 기록한 내용이 잘 안보이길래 ‘중고로 산 오래된 컴퓨터가 또 힘이 부치나 보다. 이번 기회에 바꿔야 하나? 너도 나처럼 일하기 싫은가 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미건조하게 환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전 진료를 마치고 밥도 먹기 귀찮고 낮잠이나 잘까 하고 있었는데 원장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실장님이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원장님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일겁니다. 혹시나 하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역시나 였습니다.

서버 컴퓨터가 랜섬웨어(바이러스로 컴퓨터 파일을 감염시키고 해제를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서버 컴퓨터로 이상한 사이트에 접속해서 걸린 것이 아닌가 싶어 불같이 화가 났습니다. 알고 보니 구인 이력서 안의 포트폴리오에 바이러스를 숨겨서 보낸 것이었고, 이것을 열어봤다고 질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동안 쌓아놓은 차트와 각종 기록들이 날라갈 것을 생각하니 점심 시간 내내 입안이 바짝 마르고 점심 시간이 끝날 무렵에는 어지럽고 현기증까지 났습니다. 오후에는 어떻게 진료를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납니다. 환자 절반을 급하게 취소시키고 차트도 방사선도 없이 머리를 쥐어짜내어 가며 기억을 더듬어 어영부영 진료를 마쳤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하던 차트, 방사선, 각종 의료 프로그램들의 편리함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신년 계획을 다들 세우셨을 겁니다. 장대한 목표를 세운 분도 있고 소박한 목표를 세운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올해의 목표를 당연한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희는 당연한 것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에 무심하게 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삽니다.

첫 번째로는 가족입니다. ‘니시다 데루오’라는 일본의 안과 의사는 부인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삶에 적응하는 과정을 글로 적었습니다. 부인을 잃고 한동안은 부인을 잊지 못하고 떠난 부인을 원망하는 감정으로 지냈습니다. 돌아오기를 갈망하며 부인과 함께 갔던 추억의 장소들을 찾아 다니고 공허함에 살아가다가 훗날 부인을 만나면 혼자 남은 자신이 얼마나 씩씩하게 잘 보내왔는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도록 현재의 인생을 살기로 합니다. 홀로 남은 노년의 삶을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생기는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다 보니 귀가 후의 평온한 분위기, 외출할 때 입은 깨끗한 정장,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등 당연했던 모든 것에 아내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음을 깨닫고 조용히 “고맙구려”라고 들리지 않을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우리도 오늘은 집에 있는 가족에게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두 번째로는 푸른 하늘입니다. 푸른 하늘을 본 게 언제 인가 싶을 정도로 하늘이 맑은 날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새해가 되어도 하늘이 답답하니 우울하고 기분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지난 주 강한 추위가 와서 몸을 웅크리며 출근을 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신호가 걸린 건지 차가 밀리는 건지 지루함에 두리번거리던 중에 멈춰있는 차들 위로 푸른 하늘이 보였습니다. 피곤한 출근 길에 만난 푸른 하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맑고 높은 하늘에 구름이 작게 떠다니고 있고, 모두들 출근하느라 땅만 보고 있을 시간에 혼자 푸른 하늘을 감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보기 힘든 멋진 풍경이 항상 바로 머리 위에 있었는데 우리는 푸른 하늘을 잃고 나서야 그 점을 깨달았습니다.

세 번째로는 치과의사라는 직업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치과의사라는 사실이 참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몸이 지치다 보니 한동안은 내가 과연 이 짓을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이럼 안되겠다 싶어서 제가 가장 간절했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치과의사 면허 시험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아침부터 안절부절 못하며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어서 발표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있었습니다. 면허 시험을 치던 그 순간 그리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던 그 순간 치과의사가 될 수 만 있다면 앞으로 아무것도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며 원래는 믿지도 않는 하나님, 부처님 찾고 간절히 기도했던 걸 잊고 이제는 아침마다 출근하기 싫다고 이러고 있으니 사람이란 참 간사합니다.

우리가 벗어나고 싶어하는 치과라는 공간이 지금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후배들에게는 가장 간절한 공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아픈 곳을 고쳐주어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듣고, 돈 잘 번다고 친구들에게 부러움도 사게 해준, 그리고 우리 식구 배 안 굶고 따뜻한 집에서 자며 우리 꼬맹이들 장난감 남 부럽지 않게 사줄 수 있는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대가 없이 저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고마움을 잊게 됩니다.

올해는 당연한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강희 연세해담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