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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50주년을 보내며

Relay Essay 제2345번째


서울치대 23회 졸업생이 금년 졸업 50주년을 맞이했다.

1970년 소공동 캠퍼스가 연건동으로 신축 이전했으니 1969년 소공동 캠퍼스를 떠난 우리들은 마지막 졸업생들이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옛날을 돌이키며 소공동 그 길을 다시 걸어본다. 학교 건물이 있던 자리는 한국은행 뒤뜰이 되어 잔디만 푸르름을 더할 뿐 침묵만 흐른다.

그 길에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고 지나는 차량만 넘쳐 소란스러울 뿐이다. 오랜 숙원으로 만들었던 학교 표지석 마저 한국은행 측 요청으로 철거해 학교에 보관중이라니 더욱 씁쓸하다. 꼭 다시 이곳에 옮겨져야 할 텐데 걱정이다. 캠퍼스를 오르내리던 비탈길 옆 소공다방이 있던 자리는 비탈진 벽만 남아있어 오르내리던 그 길을 어렴풋이나마 가늠케 해주어 반가웠다.

졸업당시 백 달러가 안 되는 국민 소득 이었으니 학창 시절에 경제적 여건은 열악했다. 지금처럼 풍족한 대학 생활은 엄두도 못 내었다. 원서 한권 제대로 사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낭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작은 나눔이 우리들의 낭만이었다.

캠퍼스 마당이라야 부잣집 정원만도 못한 공간이었다. 달랑 농구대 두 대가 놓여 있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땀을 흘렸다. 패티 김과 함께 ‘저경제의 밤’을 즐겼고 노래했다.

담배 한 개비 버스 표 한 장이라도 함께 나누며 우정을 싹틔웠다. 북창동 뒷골목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낭만을 토로했다. 이제 그 학우들이 이번에 80을 바라보며 다시 만났다.

‘저 친구 왜 저렇게 많이 늙었지?’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상대 친구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했겠지….

23회 졸업생은 84명이었다. 이 중 12명은 벌써 우리와 유명을 달리했고 미국에 16명 일본에 1명 국내에 55명이 있다. 한국에 있거나 미국에 있거나 자기 정해진 위치에서 치과의사로서 소임을 다하고 훌륭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본다.

참 좋은 전문직이었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동기 중 협회장을 비롯해 대의원 총회 의장, 미국 한인치과의사회 회장, 각 시도 지부장 4명, 학장 2명, 교수 3명, 분과 학회장 등 국내외 치과계의 중요 위치에서 23회 동기생들이 차지한 비중은 너무나 크다. 

50주년 행사 준비를 1년 전부터 시작했다. 남승우 회장을 중심으로 백순지 준비위원장을 선출해서 차질없이 진행했다. 미국에서는 이영송, 이수남 친구가 책임지고 독려했다.

그동안 23회 동기회는 15주년 LA, 20주년 설악산, 30주년 제주도, 35주년 낙산 비치, 45주년 여수 등에서 주년 행사를 빠지지 않고 진행했던 터라 별 차지질 없이 잘 진행할 수 있었다.

50주년 행사는 미국서 9명, 한국에서 24명 모두 33명이 여행에 참여했다. 특히 미국에서 온 김영훈 부부, 이수남 부부, 이순희 부부, 하웅철 부부, 최상집 동문께 감사를 금할 길 없다. 이순희 부군인 임영규 선생님은 소아치과 전공 선배님으로 함께 해주셔서 고마웠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온다는 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던가. 만약 미국서 행사를 한다면 과연 우리가 몇 명이나 갈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50주년 행사를 벼르고 기다렸던 LA에 있는 이영송 친구가 함께 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50주년을 준비하며 본인 자서전을 발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던 중 삽입할 사진을 찍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쳐 꼼짝 못하고 안타까움만 더해갔다. 다행히 행사에 맞춰 발간된 자서전 책자는 전야제 시간에 친구들 손에 잡히게 되었다. 정작 본인은 불참했으니 서운함은 더할 나위 없었다.

자서전을 낸 이영송 친구에 대해서 쓰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삶은 우리 민족의 삶이고 역사이며 LA이민사를 그대로 산 증인이다.

큰 업적을 남긴 등불이었다. 재미치과의사회 회장, LA 평통 회장, LA 상공회의 회장, 한미문화교류 협회장, 올림픽라이온스 회장 등 재미한인동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역사의 증인이며 주역이었다. 그의 자서전 ‘찬란한 새벽은 밤이 만든다’ 서두에 “창조 이래 어느 하루도 같은 빛이 아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빛으로 다가온다. 한 줄기 햇살에 무한한 영겁(永劫)을 본다. 오늘 하루도 영원의 하루다.”라고 썼다. 그러기에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감사하게 살아야 한다. 그 성실함은 소아과 의사인 부인이 치매에 걸려 마지막 떠날 때까지 부부의 정을 끝까지 지킨 원동력이었다.

자서전에 나온 “좋은 글을 당신과 나누고 싶어서” 아내가 쓴 “내가 남 앞에 설 때”라는 손으로 쓴 쪽지로 남긴 글을 소개하고 싶다.

- 내가 남 앞에 설 때는 늘 내 고향을 생각합니다. 바닷가 시골 작은 동네에서  발가벗고 자란 보잘 것 없는 아이였음을 생각합니다.
- 내가 일을 할 때는 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고  사랑과 희생으로 최선을 다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일을 합니다.
- 내가 사랑을 할 때는 가장 깊이 사랑한 어느 순간을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랑이 그 깊이와 넓이에 닿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사랑을 합니다.

지면상 다 옮기지 못하지만 삶의 깊이와 지혜를 남겨준 손으로 쓴 글에 감동을 느낀다. 50주년 행사 내내 이 글을 나는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자서전을 읽도록 권유했다. 왜냐하면 친구의 삶이 곧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2박 3일 후쿠오카 여행을 떠나기 전 앰베서더 호텔에서 전야제 행사를 가졌다.

한중석 치대 대학원장, 박희운 동창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50주년 기념식과 함께 1000만원 모금 발전 기금 증정식과 여흥의 시간을 가졌다. 여흥 시간의 압권은 치대 합창부로 활약했던 LA 김영훈 친구의 녹슬지 않는 노래 솜씨였다. 조용하면서도 품격 있는 노래 ‘For the good time’은 우리를 감동시켰고 차분하고 숙연하게 했다. 옛날로 돌아가 이구동성으로 녹슬지 않았다고 공감했다. 그리고 LA에서 가졌던 전각 작품 도록은 친구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어 감동이었다. carving의 귀재가 되었다.

4월 12일 부터의 2박 3일 일본 여행은 후쿠오카에서 시작했다. 일본 20세기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아리따’로 이동해 도자기 마을을 관광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 이삼평 흔적을 찾아 고령토가 없어서 채석광을 개발해 도자기를 만들었다는 그 현장을 보았다. 그 후손의 안내를 받아 도자기 관람을 했다.

유메하오시 꿈의 대교를 건너고 구로카와 료칸에서 1박의 여정을 했다.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진 온천 료칸은 분위기도 좋고 료칸 시설 및 온천물도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다른 어떤 료칸 보다 특색이 있어 모두가 마음에 들어 했다. 며칠 머무르며 휴양을 하고 싶은 곳이다.

미련을 남긴 채 이곳을 떠나 얼마 전 1300미터까지 화산이 폭발했다는 아소산을 보기 위해 아소산 대관봉에 이르러 솟는 검은 연기를 멀리 바라보았다. 칼데라 지형을 배경으로 화산 뿜는 연기를 촬영할 수 있다는데 이날은 구름이 끼고 비가 약간씩 뿌려 배경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움이 더했다. 칼데라 지형은 화산 지대의 특성일 뿐 좋은 볼거리는 아니었다. 관광 중 차안에서 동기생 한명 한명에게 듣는 살아온 얘기 들으며 우스갯소리와 유머는 우리를 실컷 웃게 했다.

여행은 주위 경치 구경도 좋지만 누구와 함께 여행하느냐에 달려있고 무엇을 먹고 얘기를 나눴느냐가 중요하다.
60년 행사도 하자고 했지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여운을 남기고 헤어졌다.

변영남
성신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