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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투가 온 날

수필

박용호 원장

 

박용호 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치과신문 논설위원
치의학 박사
수필집 《와인잔을 채우다》

 

 

 

 

 

지난겨울, 고등학교 동기회장이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치과로 연락을 해왔다. 전화로는 안 되고 굳이 점심때 찾아 오겠단다. 대학 부총장으로 바쁜 그가 전 동기회장(그도 신협 이사장으로 분주하다)과 대동했다. 요지인즉 우리 기수가 고교 총동문회장을 맡을 차례인바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사실 수입차 사장과 중견기업 사장 동기 두 사람이 물망에 올랐는데 그들이 고사하니 나에게 밀려온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아……. 감투가 이렇게도 흘러오는구나’ 능력‧재력‧체력‧시간이 필요한 큰 자리다. 유력한 관직이나 사업가 선배들이 역임했던 막중한 직책이다.

 

“나를 생각해준 것은 영광이지만 못하겠다. 새벽 골프도 끊었고 술도 못한다.” “그건 본질이 아니잖아~”

 

옹립위원회를 만들어 돈 낼 사람 술 대신 먹을 사람 내세울 테니 걱정 말란다. 그래도 그게 어디 그런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내 말에 그들은 삼일만 더 생각해 보라며 돌아갔다.

 

그즈음 박 대통령 기소로 전국이 시끄러웠고 촛불ㆍ태극기 시위로 떠들썩했다. 감투 비리를 둘러싼 초유의 사태였다. 권력이 부적절한 사람에게 가고 잘못 사용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함량 미달의 후보자도 포함하여 십오 명이 출마했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자기 용량을 초과하는 분도 보인다. 치과계도 협회장 선거로 요란했다. 그러나 치과계는 정말 우수한 인재 세 분의 용쟁호투였다. 이상훈 원장은 시민운동식으로 자가발전하여 밑바닥부터 올라온 점이 돋보이고, 박영섭 원장은 지방치대 출신으로 역량을 축적한 점이 대단했다.

 

의지가 축적되면 목적을 이룰 것이다. 김철수 협회장은 연봉을 반납하면서까지 당선되었는데, 이는 재물이 있고 없고를 떠나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용기다. 그는 당선 후 첫 일성이 추락한 치과계의 자존심과 위상을 되돌리겠다고 하였는데, 명예를 중시하는 그의 평소 소신답다. 다만 꽃가마ㆍ비단길은 잠시이고 가시밭길의 고행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분에 넘치는 총동문회장직을 제의받았을 때 마지막 공헌기회라는 생각과 감당 능력 의문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맹자의 ‘항산항심론(恒産恒心論)’을 떠올렸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백성이 먼저 항산, 즉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보장돼야 하고 경제적 기반이 안정돼야 한다고 했다.

 

항산으로 백성들의 의식주가 넉넉해지면 그들은 저절로 예의범절을 지키고 ‘변하지 않는 도덕심(항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한 단계 더 나가서 선비는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사실 삼사십 대에는 환갑을 넘으면 항산도 되고 항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러하지 못하다. 고교 동창들은 치과의사에 대한 선입견으로 자식들 시집ㆍ장가 다 보내고 무슨 걱정이냐고 하지만 품위유지가 쉽지 않다.

 

유심일체조라지만 그게 잘 안 된다. 고위 직분일수록 그런 것을 실천할 수 있는 분이 하여야 한다. 20여 년 만에 대학 때 친했지만 그동안 소원했던 동기를 만나 저녁을 했다. 요새는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물으니 고교 총동창회장도 맡고 사회 친구들과 골프도 한단다.

 

‘아, 그래도 여력이 있구나……’

 

그 감투는 결국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좋은 회계사 동기에게 돌아갔다. 감사하고 후원을 부탁드린다고 문자가 왔다. 그리할 생각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