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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한 시기에 스펙트럼 원고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쓰고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한 끝에 결정한 주제로, 이제 막 2년 차를 맞이한 신규 치의가 아닌, 13년 차 노숙인 상담원의 넋두리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2008년도부터 노숙인 상담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활동이란 거창할 것 없이, 주로 야간 시간에 서울역 인근 노숙인들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필요한 것이 없나 살피는 정도의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다만 동절기에는 이러한 활동의 내용이 조금 변경됩니다. 최대한 넓은 지역을 빠르게 다니며 안부 대신 생존을 확인하고, 가지고 간 핫팩 등의 용품을 나눠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대신 현실적인 일들에 집중하다 보면, 볼멘소리를 듣는 일도 많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담배 한 개비 얻어 피며, 지하철을 타고 종점에 다녀온 이야기, 오랜만에 가족과 연락한 이야기 등 온종일 아껴 둔 보따리를 풀었을 텐데, 짧은 인사만 남긴 채 돌아서는 모습이 야속했겠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저 또한, 친근하게 지내던 한 노숙인과 어색해져 버린 일이 있습니다. ‘노가다’를 뛰고 온 날에는 그가, 일이 없어 허탕을 친 날에는 제가, 돈을 내서 컵라면을 사 먹으며 담소를 나누곤 했는데, 동절기 비상에 제 마음이 급한 나머지 컵라면 값만 그의 손에 쥐여 주고는 매몰차게 돌아가 버리는 무례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전해 듣기로 그는 평소 잘 마시지 않던 술을 잔뜩 마시고는 제 욕을 그렇게나 했다고 합니다. 사과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저는 강릉에서의 일상이 다시 바빠져 다른 상담원에게 그를 부탁했다는 사실마저도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무난하게 2월을 보내던 중, 세상이 어수선해졌습니다. 신종 바이러스의 전파 양상이 무척이나 거세진 것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 허우적대며 불안감만 더해가던 어느 저녁, 동료 상담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어떤 노숙인이 좀 바꿔 달랍니다. 내가 강릉까지 와서 술주정을 들어줘야 하나... 짜증이 나려던 차에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야 인마 너 컵라면 언제 먹으러 올 거야. 내가 그때 그 돈 안 쓰고 그대로 가지고 있어. 아 그런데 지금은 시기가 영 안 좋으니까 좀 지나고 와라. 내 걱정은 말어! 내가 이래봬도 사스, 메르스 길바닥에서 다 겪은 몸이야. 너나 조심해! 비실비실해가지고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뚝 끊어진 전화기를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어봅니다. 누가 지금 저에게 이만한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요. 힘든 시국을 지내는 모두의 마음이 몹시도 어려울 것입니다. 개원가에 계신 선배님들의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그저 서로를 위로하며 언제나처럼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이 시간도 곧 지나가지 않을까, 그렇게 소원을 그려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