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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단체의 역사와 그 사랑의 변주곡을 완성하기 위하여 -대한치과의사협회 창립기원 변경과 재정립에 관한 소고

대한치과의사협회 기원 ‘갑론을박’ 특별 기고

이번 치협 정기대의원총회에는 총 5개 지부가 ‘창립기원 변경과 재정립’에 관한 안건을 제기하였다. 강원, 광주, 서울, 인천, 제주 지부에서다. 5개 지부의 단일안은 먼저 현행 창립일인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1921년 10월 2일 창립하고 주도한 조선치과의사회(이하 (일)조치)를 변경하는 안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그 후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1925년 창립하여 치협이 그 정신을 계승한 한성치과의사회(이하 한치)나, 광복 후인 1945년 12월 9일 결성한 치협의 전신인 조선치과의사회(이하 (한)조치) 중에서 하나를 택해 창립기원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이에 1921년 고수를 지지하는 선배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일)조치는 한반도 최초의 전국 단위의 치과의사단체였다. 1981년 대의원총회에서 집행부가 일임받아 긴 역사가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확정한 사항이다. 100주년 기념행사를 목전에 두고 정총 투표로 번복하는 것은 친일청산이라는 시류에 편승한 다수의 횡포일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치협의 생일을 갖도록 노력해주신 선배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크지만, 후배들이 올리는 변경안 역시 자긍심을 가지고 치협의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충심에 의한 것임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사 부탁드리기 위함이다.

 

역사학자 카(E. H. Carr)는 1961년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선택과 판단이 역사가의 주관과 시대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치협의 기원도 세대별 경험과 회원들의 견해,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다. 1차 사료로는 역사적 사실이 발생한 것과 같은 시기의 직접적 증거나 당사자들이 기술한 기록물이 있다.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입장에 따라 편중된 방향으로 선택된다. 1921년 고수 입장은 (일)조치 총회를 사료로 선택하여, 역대 일본인회장단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한국인은 1930년에야 2명이 (일)조치 총회에 참가했는데, 당시 (일)조치는 모든 개업의의 강제가입과 만주개척을 추진하였다.


반면 1925년 입장은 당대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인다. 한치 총무와 (한)조치 및 치협의 초대회장 등 5번의 회장을 역임한 안종서(1899-1974), 한치와 (한)조치의 2대 회장을 역임한 박명진(1903-1957), 이유경(1904-1981, 치협 5,6대 회장)은 광복 후 (한)조치가 한성치과의사회를 계승·부활한 것이라 밝혔다. 1946년 ‘조선치계’ 등에 기록된  (일)조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은 1920년대 초반부터 (일)조치가 곧 법정 단체가 될 것이니 조선인끼리 모이지 말고, 반드시 가입해야 한다고 거짓 회유했다. 관의 압박과 1941년 법적 강제로 가입된 한국인 371명, 일본인 753명 중 한국인 임원 할당은 고작 부회장 1명, 평의원이 많아야 1-2명이다. 발언권이 제한되어 존재감이 없고, 의안 입안이나 의결정족수에 미치지 못했다. 재료도 일본인의 1/2-1/3 정도로 분배받았다. 충치 예방의 날도 한국인의 몸무게를 늘려 징병으로 보내기 위한 ‘치마교련’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한국인이 시작해 이끈 게 아니라, 강제로 들러리 세워 갑질을 한 (일)조치를 기원으로 100주년을 기념하라는 것은 후배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마치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직접 한 것으로 자기소개서를 쓰는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건강한 선긋기’를 통해 군국주의에 편승해 총독부의 관선조직으로 재편된 후 쫓겨간 (일)조치와 결별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통해 치협의 회원으로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주인의식을 갖고 활동하려는 것이다.

 

한편 한성치과의사회는 일본인이 미국의 치과의사단체를 벤치마킹했듯이, 한국인 치과의사 7명이 벤치마킹하여 만든 단체이다. 정치적 주권은 잃었지만, 한국인 치과의사단체로서의 주권은 지키려 했다. 회의 목적은 한국인의 구강보건 향상과 학술연구, 친목과 복지 도모를 통한 후대 양성이었다. 구성원은 검정 출신부터 경성치전, 유학 출신을 망라하였고, 지역도 한성뿐 아니라 해주와 충북지역 등으로 확대되었다.

 

창립 당시 한국인의 구강위생이나 치과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족했다. 1924년 경성인구의 30%가량이 일본인 거류민이었는데, 일본인 치과의사 20명 이상과 입치사들이 개원하여 번성하였다. 반면 한국인 치과의사 2, 3명 중 함석태 외에는 개원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치 회원들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일간지에 구강보건 기사를 연재하고 강연을 다녔다.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치아 검진과 치료, 한국인 구강보건 역학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한치의 사업과 회원은 점차 늘어 1933년 총회에서 부회장이 추가되었고, 이사와 평의원제를 채택했다. 1936년에는 총독부 기관이나 만선지치계도 한성치과의사회를 일반의사회나 경성치과의사회, 조선연합치과의사회와 동등하게 대우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강압 속에 먼저 전국적인 단체를 만들었던 한국인 간호협회의 기관지가 1934년에 폐간되고, 한국인 의사단체도 1939년에 해체되었지만, 한성치과의사회는 1942년 10월까지 모임을 유지했다. 한성치과의사회는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유일하게 반짝이던 치과의사단체였다.

 

카에 의하면 역사 진보의 방향과 그 지평은 사회구조의 변화뿐 아니라 자신의 삶과 업무에서 역사적 인과관계를 실현하는 사람들을 통해 열린다.


한치의 함석태(1889-), 정보라(1907-1994, 1948년 도미), 박준영은 독립운동관련 경찰 조사와 투옥 경험이 있다. 박명진은 경성제대 의학박사, 이유경은 최초의 미국치과의사, 박용덕은 일본유학, 안종서는 조선위생연구소와 중국 천진 남개대학 외래교수, 불란서 조계지 개업 경험이 있다. 이들은 서로를 이끌고 격려하며 국제적인 감각과 사회지도층의 자질을 길렀다.


1946년 ‘조선치계’에는 이제야 ‘조선치과의사회’라는 단체명을 되찾고, ‘우리 치과계를 우리가 이끌 수 있다’는 한국인들의 환희가 넘친다. 1945년 조치 임원 22명 중 14명이, 평의원을 뺀 12명 중 9명은 한치 회원이다. 경성치전을 국립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합병시킨 이사회도, 1947년 부회장으로 의치일원화 운동과 구강과로의 명칭개정운동을 벌린 신인철도, 치협과 서치 회장을 가장 많이 역임한 김용진(1904-1971)도 한치회원이었다.


1981년 치협 기원을 (일)조치로 정할 때 역대 회장과 원로의 자문을 구하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치를 거쳐 치협에서 23년간 회장을 역임한 이들은 모두 작고한 상태였다. 지헌택 회장과 뜻을 모은 변석두, 지광원 대의원은 1945년 치과대학 재학생이었다. 같이 치대를 다닌 1980년도 대한치과의사협회사 편찬위원들이나 치과의사학 연구자들의 1925년 주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치협 창립기원 변경과 재정립 안건의 핵심은 빠르고 정확하게 대의원들의 총의를 모아 의사결정을 해내는 것이다. 한국은 1960년 세계 최초로 치과의사(醫史)학회지를 발간한 바 있고, 현재 치과대학과 치의학전문대학원에서 치과의사학 교육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역사교육표준에 따라 의치대 학생들에게도 역사적인 관점과 비판적 사고를 교육하고 있다. 치협 창립기원 변경에 관한 논의는 치과계의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각축장이 아니라, 세대별 개인별 경험과 관점을 폭넓게 공유하는 집단지성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역사의식도 높은 한국 국민의 신뢰를 얻는 축제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