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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선생과 순종 진료-치과의사로서의 咸錫泰<2>

기고

<지난호에  이어 계속>
최초의 치과의사 咸錫泰는  1889년 평안북도 영변군 오리면 세죽동에서 부유한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咸泳澤으로 成均館 進士와 醫官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미루어보아 그 지방의 鄕班 계층이었음이 분명하다.

함석태는 외아들 哲薰과 두딸 순정과 문을 두었고 양녀로 姜英材가 있었다. 함석태의 손자로는 완(玩), 순(珣) 어렸을때 죽은 珍과 玉 그리고 막내 각(珏)이 있었다. 그의 다섯 손자이름은 함석태가 지었으며 각자마다 ‘玉’변이 들어가 있다.

玩은 1965년 사망했고 珣은 경관으로 근무하다 6·25때 실종되었다. 아들 哲薰은 부부가 6·25때 폭격으로 사망했다. 실로 불행한 가족사였다. 珏은 살아남아 1985년 치과임상(신종호)과 인터뷰에서 증언하고 있다. “대단한 부호였음에 틀림없다. 소작을 주는 전토도 많아서 고향에서는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증조부 함진사(咸泳澤)는 재산도 많은 만큼 학교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는 등 소위 사회사업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조부(咸錫泰)가 일본유학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咸錫泰 선생님이 당시로 생소한 분야의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없었던 시절 치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동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咸珏의 인터뷰에서 보듯 경제적으로 대단히 유복한 가정환경과 사회사업에 힘쓰는 등 ‘開化’한 트인 집안이었기에 선진학문을 습득하는데 안목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일본 최초의 치과의학교인 일본치과의학 전문학교(현 일본치과대학)을 1909년 입학하여 졸업하고 1913년 말까지 동경에 머문 후 귀국하였다. 1914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되었다.

咸錫泰선생님은 1914년 6월 19일 서울 三角町 1번지 옛 제창국(濟蒼局)자리 동쪽에 함석태 치과의원을 신축하고 개업하였다. 1919년 이후 일본에 유학한 다른 치과의사들은 귀국하여 개업하기까지 일본인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독무대’로 활동하였으나 개업은 원활치 않았었다. 구강위생에 대한 인식이 낮고 국민의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자 함각은 함석태 치과의원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치과는 삼각동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요충지였다. 지금의 청계천 고가도로가 끝나고 광교로 연결되는 부근이었을 것이다. 건물은 3층 목조건물이었는데 건물도 크고 좋았다”고 증언했다.

咸錫泰 선생님은 개원당시 신문광고에 수술무료를 표방하였고 1924년 동아일보 신년원단 인사에도 口腔科 를 강조하셨다. 咸錫泰 선생님은 보철 등 치과일반을 진료하면서 구강외과에 주력하였다. 이는 당시에 번창하던 入齒師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치과의사로서의 긍지를 심기 위함이었다.

1925년 경성치과의학교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되자 한국인 치과의사 7명을 규합하여 한국인만의 한성치과의사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일본인 주도로 이루어진 경성치과의사회에 한국인이 소외되는 현실에서 한국인만의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한 것이다. 민족의식의 발로이다. 함석태 선생님은 충치예방에 대한 글을 1924년 동아일보에 기고하고 구강위생에 대한 좌담회에 참여해 구강위생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부족을 개탄하고 구강위생 계몽활동에 적극 힘을 쏟았다.

1932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에 보면 ‘의사가 출장 유치장서 치료’라는 제목과 함께 ‘함석태 의사가 입치에 전력 安昌浩의 최근 소식’이라는 부제와 함께 함석태가 安昌浩 선생을 치료했다는 내용이 보도 되었다.

“安昌浩는 상해에서 만든 틀니가 파손하여 이래 유동식만 섭취해오던 중 심문도 얼추 끝난 6월말부터 삼각정 치과의 함석태 씨의 치료를 받기 시작하여 잇몸에서 뼈조각을 빼어내는 수술을 하고 그 자리도 거의 아물었으므로 틀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함석태 의사는 매일 혹은 간일하여 경찰부유치장에 출장하여 입치를 하는 중인데 남은 것이 아래 앞니 6개뿐이므로 그것을 제하고는 전부다 틀니라 한다. 그동안 유동식만 섭취하여 건강을 보전키 어려움으로 경찰 당국에서는 특히 치료를 허한 것이라고 한다”는 내용이다. 애국지사를 치료한 내용이다.

안창호와 함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후 월북한 金若水 등의 치료도 했던 점으로 보면 일제강점기 치과의사로서의 함석태 위상은 대단히 높았다. 순종과 순종비도 함석태 치과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치과의사로서의 위상을 여러 방면에 걸쳐 떨쳤다.                           
<다음호에 계속>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변영남 치협 협회사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