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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블록 밟기 놀이

시론

꼬꼬마 초등학생이던 시절, 학교 갔다 돌아오는 하굣길에 알록달록 보도블록을 만나면 ‘빨간 블록은 밟아도 되고 하얀 블록은 밟으면 안 되는 거야’ 라며 친구들과 보도블록 밟기 놀이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빨간 보도블록을 따라 외줄타기 하듯 조심조심 걸어도 보고, 길이 끊기는 곳에서는 절벽을 뛰어 넘듯 있는 힘껏 점프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장난을 하며 오느라 10분 거리의 하굣길이 30분도 되고 한시간도 걸렸습니다. 덕분에 어머니 애도 많이 태웠습니다. 작은 데서 가지는 큰 행복은 순수한 어린이들이 누리는 특권이 아닌가 합니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어른이 되고 나서는 만나기 어려운 웃음 터지는 즐거움을 이런 별 것 아닌 놀이에서도 느끼곤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삶을 살아가면서 보도블록 밟기를 합니다. 그동안 보고 배웠던 것들, 경험해온 것들로 형성된 가치관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옳은 것은 지키고 그른 것은 삼가하려 애씁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생을 보도블록 밟기 놀이하듯 조심하며 걸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빨간 블록이 밟아도 되는 블록인데, 누군가에게는 밟으면 안되는 블록일 때도 있습니다. 또 어느 누군가는 빨갛고 하얀 블록이 깔린 길이 아니라 녹색과 검은색 블록이 깔린 길을 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남을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각자 가치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각자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바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드는 사소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이 사회는 다양한 색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조화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한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단조롭고 외롭습니다.

3월 28일에 실시될 이번 협회장 선거는 사상 처음으로 3만여 치과의사 회원들이 직접 협회장을 선출하는 직선제로 치러지게 되어, 모두가 추이를 관심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직선제 외에도 협회장 후보 출마를 예고한 후보자의 수가 많고, 그 면면이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후보들이라는 점이 결과를 더욱 궁금하게 합니다. 다양한 성향을 가진 후보자들이 입후보하여 회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후보단이 구성되어 가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여러 후보들이 등장하다 보니 연대와 단일화, 이합집산, 흑색 선전, 상호 비난 같은 기존 정치판에서 보던 모습이 보여 걱정스러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후보가 치과계 경영난 해소와 3만여 회원의 화합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공정한 선거 과정을 거쳐서 어떤 분이 선출 되더라도 올 한해 발전해 나가는 치과계가 되기를 새해 소망으로 빌어봅니다.

가장 정직하고 훌륭한 후보가 협회장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입니다. 이제는 치과 매체도 많아져서 크게 보더라도 열 개 가까이 치과 관련 신문이 있지만, 가장 오래 우리 치과의사들의 입장을 대변해준 것은 치의신보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치의신보가 얼마전 50주년 행사를 가졌습니다. 치과 원로 선배님들, 공직자, 국회의원 등 많은 귀빈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고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반 백년 동안 우여곡절을 거치며 계속해서 치과인들의 곁을 지켜준 것에 모두가 감사했습니다. 치의신보를 가리켜 일명 정론지라고 합니다. 치과 정론지라는 것은 치과의 시사를 여가 없이, 또 이해나 친분관계에 따른 포장 없이 민낯 그대로 3만여 치과회원들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습니다. 1966년 12월 15일 치의신보 1호를 보면 치과전문의 제도 추진, 경희대 의대 내에 치의학과 신설, 각 구 구치의회 결성 등을 기사로 다루고 있습니다. 치과 신문이 아니라면 접하기 어려운 소중한 소식들을 담고 있는 모습니다. 50년이 지난 오늘날의 치의신보는 임상강좌, 수필, 경영컨설트 등 독자들의 지식적인 흥미를 충족시켜 주는 면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정론지로서 치과계 소식을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한 도시에서 그 지방 소식을 다루던 조그만 신문에 루퍼트 머독이라는 20대 초반의 젊은 사장이 스포츠와 가십, 스캔들, 성과 범죄 같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기사를 가득 채우고 이것이 크게 성공하자 그 이후의 언론은 변하게 됩니다. 루퍼트 머독은 50개 이상의 나라에서 170개 이상의 방송국과 신문사를 가진 재벌이 되었고, 다른 언론들도 머독을 따라 자극적인 기사를 채우게 됩니다. 많은 언론들은 본인의 주관과 신념을 보여주지 못하고 여론에 따라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기에 바쁩니다. 정론지라면 이래서는 안됩니다.

대중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시 50년을 나아가다 보면 치과의사의 편에서 다독이고 감싸 안는 기사가 아닌, 치과의사들과 협회를 회초리질 하는 신랄한 기사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는 하고 싶은 얘기보다 해야하는 얘기를 더욱 많이 전달 해주었으면 합니다. 이런 기사를 싣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전화와 항의에 시달릴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신념을 잃지 않는 치과 정론지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치과계가 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따뜻한 어머니도 필요하지만 꾸중해주는 아버지도 필요합니다. 50주년 행사에서 역대 편집인님들 그리고 많은 치의신보 가족들의 애정과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이지만 보도블록 밟기 놀이를 하던 아이의 심정으로 그른 길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조심스럽지만 즐겁게 우리 치과의사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길 치의신보에 부탁드립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강희 연세해담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