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몸에 상처가 나거나 몸이 아픈 경우보다 마음이 다치고 아프고 상하고 상처받는 일이 훨씬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몸이 아프거나 다치면 약을 바르거나 약을 먹거나 의사를 찾아 치료를 해서 낫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더 자주 다치고 상하고 아프게 되는 마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치료하는지를 몰라서 그냥 방치해 두고 삽니다. 그것들이 누적되다보면 합병증으로 이어집니다. 우울증과 자포자기와 혹은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그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심혈관계 질환이나 각종 장기의 약화를 가져옵니다. 몸의 아픔을 돌보는 것보다 마음의 아픔을 돌보는 일이 우선입니다.몸에 상처가 날 때 새살이 돋게 하는 연고를 바르듯이 우리 마음에 상처가 날 때 바르는 약효 좋은 연고가 있습니다. 10이라는 숫자와 0이라는 숫자로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10이라는 것은 10년 후를 말합니다. 그 어떤 상처받는 말을 들었어도, 어떤 힘겨운 상황에 처했어도, 모든 마음의 상처를 당할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일이, 이 감정이, 10년 후에도 그렇게 중요할까?’ 하고 물으면서 10년 후로 훌쩍 뛰어넘어서 그 일을 바라보는 치료법입니다. 아마도 10년 후에
벌써 25년이 흘렀다. 몇 해 동안 몸 담고 있던 학교를 떠날 때 나는 강은교 시인의 ‘우리가 물이 되어’를 인용하여 작별의 말을 대신 했던 것 같다.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삶은 흐름이니 우리도 인생의 어느 구비를 돌보다 문득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잠시 멈춰 서서 시간의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기억을 건져올리다가 반갑게 두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던가? 사람 뿐이던가. 우리가 발설했던 말들도 세상을 떠돌다가 말의 주인에게 귀환하곤 한다. 발화된 말은 누군가의 가슴을 울려 어떤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저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되기도 한다.아주 오래 전 어수선한 세상 일에 시달릴대로 시달리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고 있는 내게 존경하는 어른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장기적인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하여 한숨을 내쉴 건 없네. 지금 여기서 자네가 내디뎌야 할 한 걸음만 생각하게. 그렇게 걷다 보면 어둠이 물러가지 않겠나.” 너무도 또렷한 꿈이어서 즉시 일어나 꿈을 기록했다. 그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님의 시입니다. 그래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어도 새해는 기적처럼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졌군요. 기적같이 맞이한 이 새해를 모든 존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며 살면 참 좋겠습니다.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사이 間자가 들어간 낱말들, 시와 시 사이 時間, 곳과 곳 사이 空間, 사람과 사람 사이 人間과 잘 지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시간과 사이좋게 잘 지내는 사람은 모든 시간에 대해 차별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사이가 나쁘면, 어떤 시간은 하찮고 쓸모없다고 여기면서, 더 중요하거나 더 좋아하는 시간에만 매달려 삽니다. 지나버린 시간이나 앞으로의 시간에 마음이 뺏겨 있게 됩니다. 실상, 시간이란 지금 순간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죠. 있지도 않은 시간, 즉 허상에 속아서 삶을 괴롭게 만듭니다. 걸음걸음마다 더 중요한 움직임과 하찮은 움직임을 계교하지 않고 온전히 집중하면 근심걱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공간과 사이가 좋은 사람은 어떤 공간이든 간택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어디 살 때는 참 좋았는데
갑자기 여수에 가지 않겠느냐는 지인의 제안을 받았다. 연말이라 분주했지만 ‘놀자’는 청에 응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러겠다고 말했다. 일상적 분주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던 차에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쌓아두고 떠나는 여정인지라 미묘한 설렘도 느껴졌다. 미끄러져서 조금 발을 접질려 서리병아리처럼 추레하게 걸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흔흔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눈에 덮인 산하가 눈에 들어왔다. 비어 있기에 더욱 충만만 빈 들에도, 서부렁한 겨울 숲에도 흰 눈의 은총이 내려 앉아 있었다. 눈 덮인 바깥 세상을 보며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1565년)도 떠올렸다. 저 멀리 가파르게 솟구친 설산이 보이고,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앉아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나와 겨울을 즐기고 있다. 얼음을 지치는 사람들, 팽이치기 하는 아이들, 썰매를 끌어주는 사람들, 집 가까운 곳에서 추위와 맞서듯 불을 지피는 사람들, 그리고 많은 사냥개를 거느리고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수확은 보잘 것 없다. 쓸쓸하지만 아름답다. 브뤼겔은 풍경 속에 녹아든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장자’에 나오는 빈배 이야기다.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반대방향에서 배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부는 상대가 이쪽을 보고 노를 저으리라 여기고 자기 일에만 집중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불행히도 두 배는 크게 충돌하고 말았다. 상대방의 배도 부서지고 어부의 배도 많이 다쳤다. 화가 잔뜩 난 어부가 한바탕 따지려고 고개를 들어보니 이게 웬 일인가! 상대 배에는 사람이 없었다!’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너 눈을 어디 두고 다니냐, 누가 잘했네 못했네, 물어내라’ 하며 큰 싸움이 났을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몇날 몇일 잠도 못 이루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것이다. 온 가족과 친척들을 끌어들여 싸움을 키우고, 그래도 뜻대로 풀리지 않을땐 법정으로까지 갈수도 있다. 때론 그 일로 인해 상대방이나 자신이 억울하여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단지 그것이 빈배였기 때문에’ 사공은 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부주의로 충돌을 일으킨 것을 부끄러워하며 빈배를 보고 허허 웃어 넘길 뿐이었다. 배는 몇푼을 들여 수리하면 된다. 그 일은 그저 그것으로 끝이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 ‘생각의 장난’이 일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정한
유럽의 몇몇 도시들을 떠돌다 돌아왔을 때 만나는 이들마다 이구동성으로 묻는 질문이 있었다.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어요?” “어느 도시가 제일 좋았어요?”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글쎄, 어디가 좋았던가?” 하며 뜸을 들이면 답답하다는 듯이 “그래도 마음에 가장 남는 곳이 있을 것 아니에요?”라며 대답을 다그친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몇몇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실상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것도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나 잘 아는 이가 아닌 생면부지의 사람들 말이다.이탈리아의 트레 폰타나 성당에서 나는 하얀 행주 같은 걸레를 들고 장의자를 닦고 또 닦는 노수녀의 모습을 숨죽이고 바라본 적이 있다. 그의 걸레질은 기도였다. 시인 고진하는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가 빨고 또 빤 행주를 가지고 날마다 장독대의 항아리를 말갛게 닦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장독대야말로 어머니의 성소였다고 노래한다. 법고 소리를 듣고 싶어 산중에 있는 사찰을 찾아갔다가 깨끗하게 비질된 절 마당을 보는 순간 마음이 정갈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파리의 뒷골목을 걷고 또 걷다가 다리쉼이라도 할겸 찾아 들어간 작은 예배당에서 블루진 차림의 중년 사내
고속도로에서 차를 운전하다 보면 느린 속도로 추월차선을 차지하고는 흐름을 방해하는 차량들이 있다. 그럴때 비켜달라는 뜻으로 가까이 따라붙으면 대개는 옆차선으로 비켜 준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차가 있으면 화가 날 때가 많다. 그럴때는 얼른 2차선으로 이동했다가 보란듯이 그 느림보 차량 바로 앞에 끼어드는 방식으로 내 화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향해서 마음으로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다툼이 많으면 늘 지는 법인데…. 도덕경에는 ‘적을 잘 이기는 자는 적과 싸우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싸우려는 마음 자체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그와 싸우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면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낸다’라는 말이 나온다. 가장 잘 싸우는 사람의 경지이다. 어떤 왕이 훌륭한 싸움닭을 선물로 받았다. 왕은 싸움닭을 길들이는 사람에게 가져가서 최고의 싸움닭으로 만들어달라 명을 내렸다. 시간이 좀 흐른뒤 왕이 다 되었느냐 물으니, ‘아직 덜 됐습니다. 저 닭이 약한 닭이나 강한 닭이나 무조건 싸워서 이기려고만 합니다’ 하고 길들이는 이가 말했다. ‘그러면 잘싸우는 것 아니냐?’ ‘아닙니다. 아무하고나 싸우
가을 추(秋)는 벼 화(禾)자와 불 화(火)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볕에 말리는 풍경을 묘사한 것이라는 말이다. ‘말의 우주’에서 우석영 선생은 그것을 뒤집어 곡식이 태양처럼 불타오르는 사태라고 푼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곡식 뿐인가? 사과도 감도 붉게 무르익고 있다. 익숙한 방문객처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이 찾아온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주여, 해시계들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오곡 무르익은 들판에 바람이 불어오게 하소서.//주여, 마지막 남은 열매들까지 익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열매들이 영글도록 재촉하시어/단맛 중의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소서.”교우 한분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사무실 창틀에 걸어놓았다. 일을 하다가 문득 눈을 들어 창쪽을 바라볼 때마다 그 붉은 감 열매는 수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나 또한 흐뭇한 미소로 응대했다. 채 두 주가 지나지 않았는데 딱딱하던 감이 홍시가 되었다. 무르익은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는데 곁님은 질크러지기 전에 먹어야 한다고 채근한다. 그제서야 할 수
‘기러기 울어 예는’ 가을 하늘은 숙연한 인생 학습장이다. 얼핏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지만 기러기가 행렬을 이뤄 비행하는 그 깊은 철학을 알고 난 후, 기러기의 행렬을 보면 울컥 눈물이 솟기도 한다. 기러기는 겨울을 나기 위해 추운 지방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기나긴 여행을 시작한다. 무려 4만킬로미터가 넘는 엄청난 거리를 거친 바람속을 가르며 목숨을 건 비행을 감행한다. 이들은 흔히 시옷자 대형으로 무리를 형성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러기 비행의 철학과 과학이 바로 여기에 숨겨 있다. 앞에서 날고 있는 동료의 날갯짓으로 인해 뒤따르는 기러기들은 70%이상 날아오르는 힘을 쉽게 할수 있단다. 그래서 당연히 제일 힘든 이는 선두기러기이다. 많든 적든 일행을 인도해야만 하는 책임을 진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중력을 온몸으로 받으며 외롭고 힘겨운 비행을 하는 존재다. 그런 선두를 위해 기러기들이 합창하듯 내는 소리가 있다. 끼룩끼룩 끼룩끼룩~ 이것이 바로 선두에서 날고있는 대장에게 지치지 말라고, 당신의 수고로움으로 인해 수많은 기러기가 뒤따라 날고 있다고,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소리란다. 때때로 지친 선두를 위해 바로 뒤따라 날고 있는 기러기가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는 줌파 라히리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피르자다는 지금은 방글라데시의 수도이지만 과거에는 파키스탄의 일부였던 다카에서 식물학 교수로 재직하던 사람이다. 정부의 후원으로 뉴잉글랜드 지역의 나뭇잎을 연구하러 미국에 온 사이 조국은 내전에 휩싸였고 다카에 남아있던 가족들과의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인도 출신의 대학 교수인 ‘나’의 아버지는 피르자다 씨를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나누곤 했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먼 훗날까지도 음식을 먹기 전에 피르자다 씨가 했던 이상한 행동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가슴 호주머니에 넣어둔 시곗줄이 없는 평범한 은색 시계를 꺼내 주위에 흰머리가 촘촘히 난 귀에 잠깐 갖다 댄 다음, 엄지와 검지로 재빨리 태엽을 세 번 감았다. 그는 나에게, 손목에 찬 시계와는 달리 호주머니 시계는 다카 지역의 시간에 맞춰져 있어서 열한 시간 빠르다고 설명해주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 시계는 커피 테이블 위의 종이 냅킨에 놓여 있었다. 그가 그 시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다.”(축복받은 집, 마음산책, p.59)피르자다 씨가 커피 테이블 위에 은색 시계를 내려놓은 모습을 떠올
베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베틀에 날실과 씨실을 번갈아 교차시키면서 하나의 천이 짜여진다. 날실만으로도, 씨실만으로도 천이 되지 못한다. 그 둘은 필연적으로 번갈아가며 교차되어야만 한다. 우리네 인생도 꼭 그렇다. 기분 좋고 수월하게 해주는 날실같은 상황과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씨실같은 상황이 왔다갔다 하면서 인생이라는 천이 짜여진다.정확히 말하면, 모든 인생은 본디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진리이다! 어느 인생도 날실만 있거나 씨실만 있지 않다. 제아무리 조건 좋아보이는 사람도 그 사람만이 감내해야할 힘겨움들이 오고가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그렇다. 때로는 수월하고 내 뜻대로 되다가도 어느순간 기분이 가라앉고 일이 꼬이고 절망적인 상황이 꼭 온다. 그러다 다시 기분좋은 일이 생기고, 또다시 예상치 못하게 힘겨운 일이 가로질러 간다. 그렇게 번갈아가며 우리네 모든 인생은 만들어진다. 사실 씨실이건 날실이건 실 자체로는, 즉, 그 일이나 상황 자체로는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없다. 정확히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또는 불행한 일이라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으랴. 지나고 나면 꼭 그것의 역전이 일어나지 않던가. 다만 그 순간에 그것에 어두울 뿐. 그러니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