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부족한 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이런사람이고 싶다’는 이상적 상태를 설정해 놓고 그 설정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상적 상태는 현재의 자신과 반대의 모습이기 쉽습니다.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고 싶어’라고 설정해 놓으면 늦잠자고 일어나면서 부터 자신에게 짜증이 나고 속으로 쥐어박습니다. ‘넌 진짜 문제야, 또 늦잠자고, 왜 늘 이모양이야?’ 누구처럼 되기 위해서, 누구처럼 살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이 설정한 상태로 되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버려지고 무시당합니다. 삶이 괴로워지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현재를 비난없이 어여삐 수용하게 되면 어디서 무엇을 하여도 빛이 날 것이고 삶이 평화로워집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외모가 어떻든, 실력이 어떻든, 성격이 어떻든, 인연이나 주변환경이 어떻든 그냥 지금 생긴 그대로 온전하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가장 그것다운 모습으로 태어나 자신만의 삶을 운영하면서 성장해갈 뿐 더 훌륭하고 더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물고기를 보고 너는 왜 그렇게 생겼고, 왜 그렇게 사냐고 비난하지
편견 없는 사람으로 살기 출가한 지 얼마 안 돼서 장애우가 모여살고 있는 소쩍새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는 후원금 횡령사건으로 인해 장애우에 대한 후원이 없어 더욱 힘든 때였다. 이럴 때일수록 더 가봐야 한다는 은사스님의 주장에 모두가 수긍하여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소쩍새마을의 첫인상은… 글쎄 뭐랄까? 약간 휑한 느낌도 들고, 불어오는 바람도 비릿하게 느껴지는 게 깔끔하지 못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경직된 태도로 서먹하게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였다. 여럿이 모여 있던 무리 속에서 웬 남자가 돌진하여 달려오더니 나를 털썩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그 당혹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주위의 모든 시선이 날 향해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사람을 떼어내려고 마구 밀쳐냈다. 하지만 그 친구 힘이 어찌나 센지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밀쳐내려고 하면 할수록 내 몸을 더 꼭 죄고 놓지 않았다. 그때 옆쪽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던 스님 하시는 말씀이 “가만히 있으면 된다. 니가 좋은가보다. 자비심을 갖고 어른처럼 굴어라.” 그러시는 거다. 그 당혹감이란…. 할 수 없이 나는 죽은 듯이 눈을 감았다.
남을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가는 곳마다 정원에 제초를 잘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풀을 뽑는데도,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이들은 알면서도 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고 있지요. 그럴때 제 마음속에서는 말이 참 많아집니다. ‘왜 저렇게 자기밖에 모를까’ 그대신 저는 화분에 물주기를 잘 못하고 그들 중 몇몇은 그것을 제 것처럼 보살필 줄 압니다. 그러면서 화분관리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밖에 모른다며 한심해 하겠지요. 사람마다 관심있고 좋아하고 능하고 밝은 분야가 다를 뿐이지 누구나 다 일정부분 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며 살아갑니다. 자기가 한 것은 잘 기억하고 남들이 하는 것은 잘 보지 못해 오해와 불평이 쌓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을 공익심이 있다거나 이타적이라거나 훌륭한 태도라고 여겨져 왔고, 그런 태도를 길러야 한다고 가정과 학교에서 익히 배워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월등하게 남을 잘 배려하고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도 꼭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모든 인간행동의 궁극 목적은 자기 좋자고 하는 것, 즉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회사를 위해 밤낮으로 충성을 하는
우주심과의 접속 정색을 하고, 전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말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완전히 힘을 빼고 말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사실 삶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걷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가끔은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일상은 대개 담담하고 심심하다. 그래서 권태롭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람들이 짜릿함과 자극을 구하는 것은 일상이 감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끔 벗들과 ‘잡담회’를 연다. 말 그대로 잡담을 하는 모임이다. 잡담회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배제하지 않는다. 주제는 없다. 그 시간, 그 장소가 우리에게 시키는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제한은 있다. 가급적이면 연예인들에 대한 가십이나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은 경청하되 거기에 대해 비평을 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논쟁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잡담회에서의 논쟁은 대립하는 두 당사
헌신의 사슬 어려서부터 알던 선생님 한분이 부탁이 있다며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부탁인 즉, 자신의 나이든 언니가 많이 아픈데 아무래도 마음의 병인 듯싶으니 한 번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워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댁으로 향하는 길에 그동안 언니분이 많은 희생을 하며 살아오셨다는 얘길 들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분은 아주 곱게 나이가 드신 분이었다. 말씨, 표정, 행동거지 하나하나 모두 얌전하고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말씀도 없으셨다. 그래서일까? 문득 저렇게 평생을 사셨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그분에게 그냥 편하게 누워계시라고 했다. 그러자 부끄럽고 조심스러워하며 자리에 누우셨다. 나는 두 눈을 감고 호흡을 깊이 하며 마음을 푹 쉬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내버려두기를 5분정도. 누구도 입 떼는 사람 하나 없이 다들 우리의 행동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언니분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지금 현재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대략 들어 알고 있던 나는 그분의 삶이 안타까워 그분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천천히 그리고 뜨문뜨문 말했다. “…왜 그렇게 사셨어요? …그래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이제는
아내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 변경수 목사동녘교회 최초의 인간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안쓰러웠던 하나님이 어느 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뒤 그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그것으로 배필을 만들어 주셨는데 아담은 배필을 보자마자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세기 2:21-23)고 좋아하며 감탄 하였습니다. 아담의 이 찬사는 역사 이래 최고의 찬사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아내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내가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일텐데… 그런 아내를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대해왔는가 생각해보면 미안한 마음에 괜시리 숙연해집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후 가장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 아내입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대부분이 잠깐의 인연이요, 스쳐 지나가는 만남인데 언제나 내 옆에 있는 오직 한 사람, 아내만은 가장 긴 시간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20대부터 항상 내 곁에서 나의 삶과 함께한 단 한사람이 아내라는 사실을 떠올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목회하면서 늘
봄과 함께 K 형제님을 떠올리며… 해마다 봄바람이 불면,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짧은 머리칼과 긴 눈썹, 그리고 목에는 호수를 꽂고 있었고, 코에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었던 K 형제님! 그 분을 처음 뵌 지는 16년 전 생활이 어려분 분들이 입원하시는 어느 병원의 병실이었습니다. 처음 그 분 병실에 갔을 때의 인상은 오랜 동안, 아무런 보호자 없이 혼자, 외롭게 누워 계신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한 달에 한 번, 그 곳 병원 환자들의 미사와 영적인 도움을 드리러 갔으므로 그 병원을 갈 때 마다, 그 분 병실에 가서 편안하게 만나곤 하였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내가 병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언제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힘든 몸을 일으켜 침상 위에 무릎을 꿇고 계셨으며, 특히 봉성체, 즉 미사 때 축성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 마다 그러지 마시라고 그냥 침대에 누워 계셨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려도 한사코 손짓을 하면서 정중하게 무릎 꿇고, 눈을 감으시고는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나면 어린 아이처럼 환하게 그리고
행복·웃음 변경수 목사동녘교회 숨넘어갈 듯 웃는 10대 청소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더라’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을 얼굴에 그려놓고 연기하는 광대처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나의 얼굴표정을 살펴봅니다. 감정노동자의 직업적 웃음이 아닌 가슴이 웃는 진짜 웃음을 짓고 사는 이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왔다’고 했습니다. 행복하고 싶은 마음은 욕망이 아니라 본능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얼굴웃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웃음과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복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하늘의 은총으로 주어졌지만 행복은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준 하늘은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돕고 있습니다. 내가 생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공기, 물, 자연, 사랑하는 마음 등등… 우주가 떠받치고 있는 나의 생명을 행복하게 만들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하늘과 내가 협력하여 이루는 ‘신인협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
어느 노(老) 수도자의 작은 음악회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어느 평일 날 저녁, 함께 살고 있는 할아버지 수사님께서 느닷없이 내 방에 오시더니 캔맥주를 사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수사님은 몇 일 동안 감기 몸살로 앓아누우셨는데, 갑자기 맥주를 찾으시기에 여쭈었습니다. “수사님, 다 나으셨어요?”그랬더니 그 수사님은 대뜸, “맥주 한 잔 마시면 곧 나을 거야!”평소에 그런 분이 아니시기에 좀 놀랐지만, 아무튼 맥주 캔 두 개를 사가지고 수사님 방에 갖다 드렸습니다. “수사님, 맥주 사왔어요!” 수사님은 웃으시더니, “맥주는 시원할 때 먹어야 최고지.” 그렇게 맥주 한 캔을 ‘꿀꺽, 꿀꺽’하며 드시더니, 낡은 카세트에 테이프를 집어넣더니 음악을 틀어 주었습니다. 순간, 유명한 가수 ‘사이먼과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노래의 전주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 수사님은 잠옷 바람에 벌떡 일어서시더니, 당신 방 불을 끄고 취침 등을 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이 노래를 불러 주려고 맥주 사오라 그랬지!” 그리고는 노래가 나오자, 립싱크를 하듯 입 모양을 비슷하게 벙긋 벙긋 거리면서 실제 그 가수가 노
왜가리 할아버지 박성현 교수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새해를 맞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중년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십대 이십대 때는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지나가던 시간들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문득 느낀다는 건 그만큼 세월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삶의 유한성을 피부로 절감하게 되면서 삶을 의미있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송곳처럼 예리하게 중년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신년 초 우리 가족은 새를 좋아하시는 장모님을 위해 경남 창녕에 있는 우포늪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고니, 청둥오리, 검둥오리 등등의 철새들이 군집해있는 우포늪의 아름다운 광경에 빠져 우리 가족은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강추위도 잊은 채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망원렌즈가 달린 사진기로 철새 사진을 찍고 있는 노년의 남성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진기로 봐서는 전문적인 사진작가인가도 싶었지만, 낡은 군용 점퍼와 바지차림에 소형 트럭을 몰고 왔으니 그 신분을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갔고, 그 분은 자신을 우포늪을
두 발로 오라 변경수 목사동녘교회 세계문화 여행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세상에 참으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 생활방식이 있음을 새삼 알게 됩니다. 세상 구석구석에 각양각색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에서 공통점으로 발견되는 것은 신(神)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신에 대한 대상이나 신앙의 내용, 형식은 다르지만 예를 갖추고 신을 대하는 겸허한 모습은 다 같습니다. 하나같이 진지하고 간절합니다. 연약한 인간이 절대자에게 자신의 안전과 안녕을 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께 복을 비는 ‘기복(祈福) 신앙’은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복신앙을 미신이라고 터부시하기도 합니다만 기복신앙이 문제가 아니라, 책임감 없이 자신의 것만을 달라고 복을 비는 기복주의가 문제입니다.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지극정성으로 천지신명께 가족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모습이나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몇 개월 집을 비우는 남편의 머리에 안전을 기원하며 버터를 바르는 티벳 여인의 간절함에서 인간미를 느낍니다. 천국가기 위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동기가 어떠하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삶을 거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