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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어느 인문주의자의 꿈
조영식(본지 집필위원)

관리자 기자  2000.04.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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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마지막 노벨 문학상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에게 주어졌다. 그는 도서전시회장에서 만난 기자가 「수상 후 달라진 점이 있는가?」를 묻자, 늘 하던 대로 애견과 산책하고, 치과에 다닌다고 대답하였다. 전후 세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설가에게, 「치과 방문」은 일상성의 기준이 된 것이다. 영화를 통하여 잘 알려진 「양철북」의 난장이 주인공을 기억하는 분은 많겠지만, 1969 년에 발표한 네 번째 장편 소설 「국소마취를 당하여」를 알고 있는 독자는 적을 것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소설의 공간인 치과 진료실에서 교사인 주인공과 치과의사가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눈다. 영국의 의료사회학자 사라 네클네톤은 「권력, 통증 그리고 치의학」에서 이 소설의 첫 장면을 길게 인용하고 있다.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등을 통하여 미시적 권력과 앎의 의지, 담론의 형성 과정을 통찰하였던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의 관점에서 치의학과 치과의료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현재, 몇 명의 치과의사에 의하여 번역되어 출판을 앞두고 있는데, 치의학의 시선이 환자의 신체와 정신에 개입하여 생리적 공간, 생리심리적 공간, 심리적 공간, 사회적 공간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치과 치료와 관련된 통증,공포, 불안은 20세기 초엽 정신분석학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20세기 중반부터 심리학, 행동과학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보건학의 건강과 질병 행동 연구, 의료 이용 연구로 발전하고 있다. 세계 치과의사연맹(FDI)이 발간한 「사회과학과 치의학」은 이 분야의 방대한 문헌 고찰이다. 행동과학자들은 치과진료실에서 이상적인 연구 대상과 현장을 발견하였고, 일반 이론을 발전시켰다. 치의학은 행동과학의 연구 성과로부터 유용한 행동치의학의 지식을 축적시켰다. 행동과학과 치의학은 학제간 연구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소아치과학을 중심으로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되는 지금, 역설적으로 인문학의 필요성은 날로 증대하고 있다. 기존의 생물학적, 기계론적 「생의학 모델」은 더 이상 환자들과 사회의 다양한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다. 좁게는 진료실에서, 넓게는 보건 정책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인문사회과학적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기창덕 박사님은 역사학의 관심을 학문적으로 승화시키고, 치과의 울타리 밖으로 넓힌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로 기억될 것이다. 박사님은 말년에 치의학의 선구자 피에르 포샤르의 흉상을 제작하여 후학들에게 선물하셨다. 역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공동체는 「양철북」의 난장이 주인공처럼 성장이 정지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