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선 정치판이 그렇다. 말도 되지 않는 선거공약을 늘어놓거나 상대후보를 깎아내리기 위해
상식이하의 비방을 서슴지 않는 수준 낮은 정치를 쉽게 볼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 정당을
옮기고 그러다가는 아예 새로 만들기도 하고 정치적 소신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한국의
무책임한 정치는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치더라도 우리 치과계도 매우 걱정스럽다. 얼마전에 의약분업
때문에 의사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입장을 국민들에게 알린 적이 있다. 의사가 데모를 한다고
사회가 떠들썩했었는데 유독 치과의사들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다. 길거리로 나서서
데모를 하는 일이 능사는 아니지만 치과의사도 약처방을 하고 있고 이 문제는 의약분업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수가, 나아가서는 치과의사의 사회적 위치와도 연관된 복잡한 사안이므로
치과의사협회는 당연히 치과의사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발빠른 대응을 했어야 했다. 아무래도
우는 아이에게 젖 한번 더 주는 법인데 팔짱끼고 앉아 구경만 해서야 되겠는가. 안이한 치협
임원과 담당이사들때문에 치과의사들의 불이익이 나중에라도 일어날까 걱정이다.
치과의사협회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치과의사들의 권익을 도모해야 마땅할 것이다.
지난달인가 제자들과 후배들의 연구실험결과를 이용해서 실험연구비를 차지하는 교수가
있다는 TV방송 때문에 잠시 소란스러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후배수련의와 저녁식사를 하는 중에 이 후배가 갈비살과 소주를 배불리
먹고나서 하는 소리 또한 가관이다. 모 선배님께서 발표할 논문원고를 자꾸만 후배들에게
대신 쓰게 하고 자신은 몇번 고치기만 해서 자기 이름으로 발표를 한단다. 누군지 알아보니
서울 한복판에서 무슨무슨 연구소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제법 크게 치과의원을 하고 있는
선배님이었다. 수년전에 협회지에 발표했었던 여러편의 논문들도 상당수가 후배들을 시켜서
정리한 것이라 한다. 심지어는 강연회에서 발표하는 것까지도 후배들에게 준비를 시킨다고
한숨을 내쉰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 선배라는 사람이 요즘에는 모 치과대학에 교수로 들어가려고
물밑운동(?)중이란다. 후배인 죄로 잡일을 떠맡은 후배들도 잘한 것은 아니지만 후배수련의를
이용해서 무책임한 원고를 발표하는 선배에게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삐뚤어진 공명심과 무책임성이 잘 조화를 이룬 경우라 생각된다. 어떤 분이 치과대학
화장실에서 손씻을 비누와 수건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지적하셨다. 학생들이
감염방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갖지 못한 채 치과의사 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치과대학 책임자가 취한 행동은 치과대학생들을 위해 비누와 수건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무책임하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떻게 하냐며 야단을 쳤단다. 어느 쪽이 무책임한 것인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본인도 참 무책임한 것 같다. 바쁘고 귀찮다는 이유로 잘 맞지 않는 보철물을
그냥 환자 입에 꾹 눌러준 것도 기억나고, 내가 만들어준 틀니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그냥 돌려보낸 것도 마음에 걸린다. 나의 무책임한 한마디에 혹시라도
마음상했을 후배도 있을 것이고 무책임한 행동에 화가 났던 선배님도 계실 것이다. 사소한
것이려니, 상대방이 이해해 주겠거니 혼자 생각해 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마땅히 내 스스로 해야할 일을 옆사람에게 미룬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무책임해졌을까? 또 나는 왜 이렇게 무책임해졌을까?
몸서리쳐지게 무섭고 두려운 일은 우리가 무책임한 것에 대한 무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