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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의약분업시대 Ⅱ
김영진(본지 집필위원)

관리자 기자  2000.07.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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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 몸을 다치거나 열이 나고 아플 때면 할머님께서는 정성어린 잔밥을 먹여 주셨다. 그 잔밥이란 조나 쌀 같은 곡물을 작은 보자기로 단단히 싼다음 다친 부위나 이마에 대고 적당한 압력으로 대었다 떼었다를 반복하는 단순한 작업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효과는 대단했던 것 같다.  한참을 계속하고 난 후 할머니께서는 조금 작아진 주머니를 들어 보이시면서 “그녀석 많이도 먹었네, 곧 낫겠네!” 하시는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곡물은 반복되는 다지기로 조금 줄어 보였을 뿐이고 나는 약간의 냉찜질 효과와 심리적 안정을 얻었을 뿐이었겠지만 그 푸근함 속에 한숨 자고 나면 특효약을 먹은 것처럼 가뿐해지곤 했다.  어쩌다 이런 방도가 신통치 않다 싶으면 집에 모셔와 침을 놓아주던 분이 계셨는데 동네사람들은 그 아저씨를 침쟁이라고 불렀다.  한번은 할아버지를 따라 사랑방에 조그마한 약장을 놓고 약도 함께 지어주시는 다른 동네의 침쟁이 집에 갔었는데, 할아버지는 그를 의연님(의원님)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를 물은즉 약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의연님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학부를 졸업한 후로 수입증대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임상강의와 세미나의 홍수 속에서 지내왔다.  그러나 치과 환자에게도 무수히 투여되는 다양한 약물에 관한 학술 모임은 한번도 접해 본적이 없다.  의약분업에 즈음해 약사들은 수많은 학술 및 임상강좌를 통하여 약동학과 복약상식, 약물상호작용, 부작용과 전신작용 등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분야에 대한 완벽한 대비를 해왔다.  한편, 치과의원에서 발행된 처방전이 어느 약국 누구의 손을 통하여 조제가 이루어질지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 그리고 가벼운 두드러기 증세만 보여도 환자는 조제해준 약사를 찾아가 항의하려 들것이다.  이제 환자 개개인의 전신상태와 특정질환, 과민증의 여부나 시술의 경중에 맞도록 적절하고도 안전한 약제를 선택하지 않고 관행에 젖은 처방만 발행하거나 병력에 맞는 신중한 처방을 회피하는 치과의사들은 시련의 시대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들 모두는 새롭게 열리는 질서를 사회적인 신뢰의 기회로 맞이할 것인가, 위기로 맞이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