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나이로 41년 개원 올해 84세
투철한 천직의식 환자고통 어루만져
“기력 다할 때까지 계속 진료할 터”
치과의사가 60년간 치과의료에 봉직할 수 있을까? 그것도 신경통이나 디스크 등 직업병 없이
건강을 지켜 가면서 투철한 천직의식 가지고 말이다.
60년간 오직 치과진료 외길을 걸어온 노 치과의사가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면허번호 1백17번. 목포시에서 영택치과를 개원하고 있는 李濟璟(이제경) 원장이 화제의
주인공.
차남도 현직 치과의사이며 그의 아들도 독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있어 3대가 의사라는 쉽지
않은 기록도 李 원장은 간직하고 있다.
올해는 유독 李원장의 감회가 새롭다. 12월이면 치과의사 60년 인생길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1917년 생으로 올해 84세인 李 원장이 첫 개원한 곳은 전라남도 완도. 약관 24세의 나이였다.
일본 동경 재경 상업학교를 나오고 일본대학 치과의학교 졸업, 41년 12월 부모님이 계시는
완도에서 첫 진료를 시작했다. 이후 45년 목포로 이전해 영택치과를 열고 현재까지 목포지역
주민들의 구강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60년 동안 진료에 임하면서 흔한 직업병 없이 건강을 잃지 않고 있는 노 치과의사의 비결은
무엇일까?
李 원장은 다양한 취미생활과 운동을 손꼽았다. 화초기르기, 새기르기, 테니스 등등.
젊은 시절엔 태권도로 체력을 단련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유달산 등산을 빼 놓지 않고 있다.
물론 술 담배도 전혀 안 했다. 최근엔 혈액순환을 좋게 하기 위해 한 두잔의 약한 술을
조금씩 먹고 있을 뿐이다.
“스트레스 받으면 치과의사 오래 못합니다. 나름대로 체질에 맞는 스트레스 해소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진료를 즐겨 보세요”
건강은 타고난 체질이 제일 중요하다고 李 원장은 말했다. 어머니도 1백2세까지 장수했다며
튼튼한 몸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치과의사로서 나에게 꿈이 있다면 영택 치과 원장이 숨져 어디서 진료를 받아야 하나를
걱정하는 환자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李 원장은 60년 동안 장인 정신을 갖고 진료에 임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환자를 위한
혼신의 진료만이 존경받는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지금까지 왔다고 했다. 자기가
진료했던 환자가 다른 치과병원을 찾았을 때 후배 의사나 선배의사들의 마음속에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잘했다”는 느낌을 줘야한다는 것이다.
이 원장의 아들도 현직 치과의사다. 강남 대치동에서 이채동 치과의원을 개원하고 있는
李彩東(이채동·前 강남구치과의사회 회장) 원장이 차남이다.
“아버지의 단골손님 중에 아직도 아버지의 이름을 대면서 찾아오는 환자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환자를 대하고 진료에 전력하신 아버지의 60년 치과의사 인생을 보는 순간으로
존경심이 절로 남니다.”
李 원장이 목포에서 60년간 살아온 것은 장남으로서 노부모를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치대를 졸업한 그는 1940-50년대엔 엘리트 중에서 엘리트였다. 결심만 했다면
정계나 학계 등 비교적 화려한 길로 접어 들 수 있었음에도 한번도 외도를 시도하지 않았다.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면 의사로서 환자 곁에 있어야 된다는 옹골찬 천직의식 때문이었다.
“초창기 개원 때인 40년대엔 입치사 출신을 포함 아마 전라남· 북도를 통틀어 치과의사가
10명 이하였을 것입니다. 그땐 기공물도 직접 만들었죠. 손톱이 다 헤어질 때까지 야간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눈에 선합니다.”
발로 작동시키는 유니트 체어의 석유를 넣기 위해 완도에서 여수까지 나가 석유를 사오던
일. 한국 전쟁 중 9사단 치의장교로 이동치과진료 차량을 타고 병사들의 치료에 나선 일 등
순간 순간을 되돌아보는 이 원장의 눈엔 60년 치과인생의 감회 때문인지 어느새 눈물이
고여갔다.
“둘째 아들도 치과의사고 손자도 의사로서 내 뒤를 잇고 있어 만족합니다. 치과의사라는
직업 덕분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않고 살 수 있었고요. 요샌 폐업하시고 쉬라는 자식들의
성화가 대단합니다. 그러나 유니트 체어의 곁을 떠난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없어요. 기력이
다해 일어나 다닐 수 없을 때까지 진료실을 지킬 생각입니다.”
오늘도 李濟璟(이제경) 원장은 환자를 기다린다. 멀리서도 자신을 알아주고 20대
청년시절부터 50대 중년이 된 나이가 돼서도 수 십년을 찾아주는 단골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동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