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조사>
故이춘근 교수님을 생각하며

관리자 기자  2001.02.24 00:00:00

기사프린트

지난 1월 6일 서울치대 학장과 서울치대 동창회장을 역임했던 이춘근 전 서울치대 명예교수가 노환으로 작고했다. 그 후 2개월만에 고인과 각별했던 趙泳弼(조영필·전 치협 무임소 이사·서울 강남구 조영치과의원장) 전 조선치대 학장이 고인을 기려 애도의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곡을 한들 시원하랴! 통곡을 한들 후련하랴! 언제나 홍안의 미소를 띠시고 누구든 맞이하시던 교수님. 새해년 월초 하루날도 고생하던 모 교수의 걱정으로 대화를 시작하시면서 날짜까지 정확히 말씀하시던 교수님이…항상 주위를 살펴주시고 남을 생각하여 주심은 타고 나신 성품인 모양이셨다. 어디서나 틈만나시면 ‘치과의사’가 되신 것을 늘 자랑하시였고 누구든 부러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년퇴직 후에도 건강만 허락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봉사할 수 있고, 자기의 생활, 자기의 취미도 행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지금까지도 간판을 띠지 않고 봉사도 하고, 환자도 보고 계셨던가 보다. 치의학계 학문의 정상인 원로박사로서 치과계의 선두주자로 의학박사 1호이신 스승님은 항상 주위 발전에 도움을 주시고 노력하시는 것을 생활화 하셨습니다. 그 옛날 하나뿐인 치과대학, 치과병원의 발전이 싹이 틀 50년대 후반 소공동시절, 본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생긴 구강병리(해부)학 전공의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일입니다. 그 당시 치과병원 원장님으로 계시면서 구강외과(그 당시 명칭)를 이끌고 계실 때, 수련병원 제도가 도입되어(Kim"s Plane 처음시작) 각 과 인턴제도를 만드시고는 저보고 구강외과에서 인턴하라고 하시면서 구강외과 직원보다 더 사랑하여 주셨던 기억이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어버려지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음은 그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품위 있었던가를 새삼 생각하게 합니다. 그 당시 또 한가지 영광은 구강병리와 구강외과의 첫 연결고리로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구강외과에서 구강조직 생체검사(Biopsy) 1호를 본인이 행하였다가 사실입니다. (Biopsy chart 원본보관. 박용준환자, 49세, 남 1958.5.26) 강화에서 작은 자식을 동반하여 흰 한복을 입고 내원한 지독한 구취와 우측상악이 종창된 안모의 환자를 보시면서 조직검사를 하라고 한 말씀이 지금도 귀에 선합니다. 이도 교수님의 큰 배려가 없었다면 어떻게 졸업 전 임상실습시간에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구강외과에서 구강조직생검의 시초가 될 줄은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잠시 눈을 감고 소공동 동쪽끝 양지바른 구강외과 외래에서 치료의자를 쳐다보니 인생무상을 논한들 누가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또 한가지 그 당시 ‘치대학술지’가 공판이라는 프리트 인쇄로 만들어졌을 때 여러 교수님의 도움도 컸지만 이 교수님의 도움이 얼마나 크셨던가? 그때가 치과계 치과대학, 치과병원 발전의 시초이었던걸 생각할 때 좀더 열심히 보필하고 연구하지 못하였던 것이 한스럽습니다. 또한 그 당시 여러교수님의 연구논문을 작성하실 때 동물실험으로 희생된 동물의 비를 제작하고자 붉은 선이 그어진 갱지에 기안 작성하여 말씀드렸더니 그 즉시 바지주머니에서 돈을 주셨던 그일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한토막입니다. 그후 여러 교수님의 도움으로 신문로(그당시 비석 제작하는 곳이 많았음)에서 ‘의학에 공헌된 동물에 감사한다’는 내용을 담은 화감암 비석이 1958년 10월15일에 세워지니 그것도 꽤 오래된 하나의 사건이였습니다. 그것이 소공동 정문앞에 있었던 것이 연건동으로 옮겨져 구관앞에 세워져있는 것을 보곤하였습니다. 그후 1969년 교수님이 치과대학 학장님으로 계시면서 1922년 경성 치과의학교로 시작된 뿌리깊은 소공동 터줏대감(?)인 치과대학이 연건동으로 이전하였다는 것은 치의학 발전 특히 치과대학 번영에 크나큰 용단과 개혁을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이 없었다면 누가 감히 혁명적인 단안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교수님만 할 수 있는 치과관, 사회관, 국가관이 마음속 깊이 있는 무게있는 힘과 무한한 치과대학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밖에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본인이 알지 못하는, 치과계 발전의 기틀을 만들어주신 업적은 너무나 많을 것이다. 본인 생애에 교수님의 참다운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을 더듬게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순리의 옛말을 역행하여서일까, 까마귀 노는 강북으로 왔다가 여타의 조건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점심을 사주시면서 스승님의 제자에 대한 인생사를 이야기하여 주신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쓰다보니 너무 개인적인 과거이야기가 됐습니다. 하여간 교수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