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좀처럼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다. 얘기 도중 눈물을 보이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국립의료원 치과의무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1981년 봄 , 나는 덴마크 왕립치과대학 연수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내 옆좌석에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를 사이에 두고 한 아주머니가 어린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홀트아동복지회 직원으로 아이들을 양부모에게 데려다 주는 길이라고 했다.
아기는 자주 칭얼댔고 사내아이는 칭얼대는 아기를 제법 어른스럽게 달래 주었다. 덴마크 가정에 입양될 아이들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한지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책을 펴고 공책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사내아이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쑥스러운 듯 내게 책을 내밀어 보였다.
“숙제예요.” 3학년 국어책이었다. 순간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아이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여전히 숙제를 하는데 열심이었다. 식사 때 마다 음식도 아주 잘 먹고, 밤이면 잠도 잘 자는 이 해맑은 아이와 나는 꽤 많은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새 코펜하겐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지금까지 그렇게 씩씩하던 아이가 와락 내게 안기더니 흐느끼는 것이다.
“어머나, 어느새 아저씨와 정이 많이 들었나 보네요.” 하지만 나와 헤어지기가 서운해 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아주머니도 잘 알고 있었다.
내 품에서 흐느끼던 그 사내아이를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부모로부터, 자기가 태어난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서도 모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던 소년의 마음. 나는 그것이 희망과 사랑이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것만이 닥칠 시련을 이겨내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잃지 않는 그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이라 믿기 때문이다.
분명히 80년대 초 보다 한결 여유롭게 살게 된 오늘날에도 해외로 입양 되는 아이들, 점심을 굶는 것이 두려워 방학이 싫다는 아이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또 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흔히 사회와 체제 탓으로 돌리곤 한다. 현재 세계화한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강국과 승리자를 위한 체제라는 것이다.
설령 그런 약육강식의 질서가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결국 자본주의는 단지 메커니즘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목표와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개개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개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살 맛 나는 곳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만이 아닌 우리를 위한 목표와 의미의 추구 즉 이타심이야 말로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반드시 필요한 덕목인 것이다. 나아가 진정한 나가 되기 위해선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 건장한 청년이 되어있을 그 씩씩했던 소년이 다시 서울에 온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