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파고다공원, 중국동포교회 등 누벼
1년에 1달여 캄보디아, 미얀마 진료 출국
지난 16일 금요일 오후. 충무로 남산골 한옥마을 공원 벤치에서 김영면 믿음치과 원장과 둘만의 오붓한 데이트를 가졌다.
아직은 꽤 쌀쌀한 봄바람이 불어왔음에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와 함께 했기 때문인지 추운 줄도 몰랐다.
인터뷰를 위해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왠지 말수가 적고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는 것 같아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를 직접 만나니 그런 생각은 일시에 사라졌다.
원래 선교사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86년 대학시절부터 교회 선교단의 일원으로 봉사활동을 해오다 93년 개원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치과진료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주말이면 파고다공원, 중국동포교회. 최근엔 캄보디아, 미얀마까지...
봉사활동시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없는지를 묻자 담안 선교회(교도소에 복역했던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마련된 곳) 에서 만났던 폭력전과자와 사기전과자가 두 사람의 얘기를 들려준다.
치료를 해 줬더니 눈물까지 흘리며 고마워하던 폭력전과자. 어느날부터인가 치과에까지 술을 마시고 찾아와서는 돈을 달라며 난동을 부린다. 몇 번을 달래도 보았지만 막무가내다.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지만 이내 또 치과로 달려온다.
또 한번은 사기전과를 갖고있는 환자에게 애써 치료를 해주었는데 어느날 소식이 두절돼버렸다. 더 이상 치료를 받으러 오지도 않는다. 그러다 얼마 후 교도소로부터 날아온 편지 한통. 바로 그였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남의 돈에 손을 댔다가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됐는데, 이게 왠걸 감사하다는 말은 못 할 망정 오히려 치료를 잘 못해 줬다고 화를 내며 편지를 보내왔다.
임시 치료하는 동안 치아를 봉해 놓았던 건데 그는 치료가 다 끝이 난 줄 알았었나보다. 그사이 다시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 치료를 완전히 받지 못한 것은 생각치 못 하고 봉한 것이 떨어졌다며 다짜고짜 책임을 묻는다. 이에 그는 교도소로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재 치료를 해준다고 연락을 했다. 결국 교도소 방침상 치료는 못해 줬지만...
그것뿐인가 진료를 위해 캄보디아에 갔다가는 총에 맞아 죽을 뻔도 했다. 아직 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 총격전은 언제 어디서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그에게 그런데도 남을 위해 계속 일을 할 생각이냐고. 오히려 배은망덕한 사람들 때문에 이일에 회의를 느끼지는 않았는지 슬며시 물었더니 배시시 소년 같은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원래 다른 사람들을 잘 미워하지 않는 성격이예요" 한다.
재수시절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왔다는 그. 그래서 그는 지금의 삶을 신이 자신에게 준 보너스라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그 삶을 조금이나마 남을 위하는데 쓰기로 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에 대해 절대 회의는 없다.
그는 “제가 재벌이라서 돈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뭘 해줄 수가 있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치아진료를 해 주는 것뿐 이예요"라며 “앞으로도 힘이 닿는데 까지 진료를 할 예정"이라고 마치 저 자신에게 재 다짐을 하듯이 말을 맺는다.
2시간 가량, 공원 벤치에 앉아 그와 얘기하면서 참 좋은사람, 아름다운사람이란 생각이 점점 더해 갔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불어 양 볼엔 냉기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은 저 깊은 곳까지 따뜻해 졌으니...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속에서 흐뭇한 웃음이 자꾸만 스며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