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낳은 세계적 석학 엔서니 기든스 교수가 얼마전 한국을 다녀갔다. 알다시피 그는 분배의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와 그 반대로 경쟁적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모두를 넘어선 미래사회의 모델로 `제 3의 길"이라는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국가의 진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한국에 와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한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중앙의 보수언론의 한 유력지와의 인터뷰 기사가 한면 가득 실렸는데 대게 이런 내용이었다고 생각된다. 대담자의 질문 왈 `당신이 말하는 제 3의 길이란 중도좌파냐?", `그래, 나는 제 3의 길을 그런 의미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의 정책노선은 제 3의 길이면서 중도좌파 노선이네", `얘기가 그렇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 제 3의 길은 이념적 틀인 것 뿐이다. 그리고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는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다시 묻는다. 김 대통령은 제 3의 길 정치인이고, 또 중도좌파 정치인 맞나?", `그게 내가 이해하는 김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나, 지난 2,3년 간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의견을 말할 입장이 아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이젠 됐다는 듯 다른 대화로 넘어갔지만 그 때 대담자는 청문회에서 뭔가를 건진 스타 의원 같았다. 그만하면 기든스 교수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향후 한국사회에서 보수언론과 정객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하나 던져 주고 간 셈이 된다. 앞으로 선거 때가 되면 그 말의 영향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게 될런 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기든스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의 빌 클린턴 정부도 제 3의 길에 속하는 정부이고 중도좌파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대만,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에서 처음으로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고 이야기 했으니 그의 주장은 학문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좌"의 의미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가 될 터이다. 그러나 `좌"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를 보이는 한국의 보수층들에게는 그러한 객관적인 정의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니. 거두절미하고 `봐라, 세계적 석학이 한국의 현 정부가 좌익이라고 하지않냐, 그러면 앞으로 우리의 나아가야 할 길이란 뭐냐, 대동단결해서 좌익을 척결해야 할 것 아니냐!" 이렇게 나오지 않을 까 하는 걱정이 나만의 기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갑자기 어디에선가 차용한 세계화의 논리를 주창하더니 아직도 좌우의 흑백논리 속에서 의식의 세계화가 되지 못한 우리의 정체성 속에서 세계화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 지 참으로 아뜩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