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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가을 단상
김영일(본지 집필위원)

관리자 기자  2001.09.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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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덥네, 춥네 한다지만 들판의 곡식은 때 거르지 않고 익어가네.” 얼핏 보기에는 시집의 모서리에나 있을 법한 싯구같은 이 구절은, 사실 며칠 전 시골에서 만난 백발의 노인이 먼산에 눈을 두고 읊조리던 대목이다. 먼산에서 아득한 향수를 떠올리기라도 하듯 그렁그렁 눈가에 맺힌 측은함은 며칠동안 불면의 밤을 지새게 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인의 그 말씀이 아니었다면 가을의 정취는 내 가슴속에 어떤 느낌도 가져다주지 못했을 것이다. 더우면 여름이고 추우면 겨울이다는 생각, 더위와 추위를 인위적인 문명으로 극복하는 현실에서 치과의사인 나 역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강연과, 시술, 연구 등으로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동료 치과의사들 역시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독한 추위를 겪어야 봄의 정취를 만끽하고, 삼복더위를 이겨내야 가을정서에 젖을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 모두 올 가을에는 오래 전 우리들의 추억속에서 아물거리는 코스모스 활짝 피고, 벼이삭이 고개를 숙인 어린 시절의 향수속으로 걸어가 보면 어떨까. 그리운 이들에게는 전화나 이메일보다는 깊은밤의 절절함이 듬뿍 담겨 있는 편지를 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진 비좁은 창문의 세상을 딛고 걸어오고 있을 답장을 기다려보자. 답장이 없으면 어떤가. 가을은 그리움이자 기다림의 터전이다. 이러한 정서가 있어야 지순한 사랑이 싹트고, 넘실거려야 사회는 포근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는 가슴속에 있는 순수성을 숨기고 살아가는가.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사치냐고 한다면 할말이 없다. 하지만 이 사회는 주변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들에 의해 꾸려져 왔고 꾸려져 나갈 것이다. 그 중심에 우리 치과의사들이 선다면 얼마나 바람직할까를 생각해 본다. 앞산 능선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스산해지기 시작하면 들녘의 벼 이삭은 고개를 숙인다. 존경스럽기까지한 자연의 겸허함을 벗삼아 올 가을에는 삶의 울타리밖으로 밀어낸 문학서적을 가까이하고, 그 곳에서 잃어버린 삶을 찾아나서는 것도 생의 과정에서 값어치 있는 일이 아닐까. 삭막해져가는 사회, 나는 어린애들을 볼때마다 그들의 미래에 펼쳐질 치열하고 살기까지 느낄정도의 삶이 가련하고 안타깝다. 인간성 상실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 가을에는 우리 치과의사들이 소리없이 인간성 회복을 위해 잃어버린 아름다운 정서의 편린들을 주워담아 보자. 병든 몸을 고치고 병든 정신까지 고치는 참의사로서의 길을 올 가을에는 찾기위해 고독하리만큼 괴로워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