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욱 원장(서울치대 산악부)
“치과계 떠나는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난감”
“현재 우린 제 갈길 가고있나
우리 모두 자기성찰 필요”
北漢山 山行을 하였다. 2001년 11월 18일, 쾌청.
바람결은 차가웠지만 피부가 느끼는 감촉은 연중 최적의 날씨였다. 치대산악회의 정기산행이었다. 30대, 40대, 50대, 60대의 치과의사가 고른 연령 분포로 참석하였다.
모두 선후배간이지만 언제 만나도 형제같이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北漢山城 入口에서 大西門을 지나면 주춧돌만 있는 山映樓를 지나며 또 善政을 베풀었다는 비석거리를 지나게 된다. 너무나 많은 善政碑가 있어 오히려 의아스럽다.
본인은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善政을 베푼 대통령이 많은 이 나라의 現實이 클로즈업 되었다.
금방 20세기 초 대홍수에 滅失된 重興寺趾에 닿았다. 복원공사가 진행중인데 몇년이 지났건만 큰 진전이 없다. 절의 내부 갈등으로 공사가 지연되고 있단다.
神聖한 宗敎界도 世俗처럼 내홍(內訌)이 심한 모양이다. 큰 눈으로 보면 人間事가 大同小異한 듯.
다시 걸음을 옮겨 太古寺에 들렀다. 호기심 많은 꼬마들(젊은 후배의 아이들)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린다. 이름 그대로 太古의 적막을 깨뜨리지만 부산스런 아이들의 시끄러움이 오히려 아름다운 그림같이 좋아 보였다.
학창시절, 이곳에서 야영했던 추억이 아스라이 되살아났다. 아!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어쩌면 나의 삶도 이처럼 많은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
山神閣을 지나고 국보인 탑을 통과하여 산마루에 올라섰다. 아주 넓지 않은 바위에 스무명이 앉으며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마침 최고참 선배가 자리한 곳이 떨어지면 위태스러워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때 한 후배가 “이제 살만큼 사셨는데 아무데나 앉으시죠”라고 짓궂은 농담을 하였지만 모두 웃어 넘겼다.
즐거운 山上 뷔페식사였다.
식사후 대동문(大東門)을 지나서 우이동으로 下山 하였다. 堂山 文化院에서 즐겁게 맥주를 마시며 치과의사들이 여러 문제와 인생살이 이야기를 나눈 만족스러운 하루였다(以上은 日常的인 월례 山行日誌임)
작년 한 후배가 50고개를 넘으면서 이민을 떠났다. 유능하고 성공(?)한 치과의사였다. 치과계를 위하여 성실하게 봉사도 실천한 모범 치과의사였다. 열심히 환자 진료하느라 건강관리를 잘 못한 탓인지 더 이상 환자를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또 한 후배는 건강보험공단의 심사를 받고 있었다. 불합리하고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있으나 모욕적인 대우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환자를 진료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 산행 뒷풀이도 끝나고 귀가하는 차 속에서 40세의 한 후배가 치과계를 떠나 이민가겠다고 하여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민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이지만 다시는 핸드피스를 잡지 않겠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10여년도 더 전에 똑같은 말을 하고 이민간 동기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치과의사로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난감하였다.
의약분업으로 야기된 의료계 파업을 겪으면서 그동안 참 욕도 많이 먹었다. 그냥 치과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모든 국민, 친구 심지어는 친인척에게서까지 끔찍할 만큼 모욕적인 질시를 받았었다. 치과의사로 환자를 진료한 것 뿐인데 그렇게도 욕 먹을 짓을 했었던가?
의사라는 집단이 그렇게도 부도덕하고 이기적이었던가? 온갖 매스컴에서 이구동성으로 소수집단을 나쁜 죄를 저지르는 듯 연일 매도할 수 있는가?
이러한 환경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스트레스의 특효약은 여행이다. 큰 용기를 내어서 여러날 여행을 하였다. 나의 지나간 삶을 반성하고 내일을 생각하고 싶었다. 뉴욕의 세계 무역센터가 테러 때문에 주저 앉아 온 세계가 혼돈에 빠져 있었던 때였다.
비행기 타기가 꺼림칙하였지만 테러 염려가 가장 작은 곳을 선택하였다. 무사히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를 돌아볼 수 있었다.
온갖 매스컴에서 나쁜 영향으로만 매도하는 의료계를 잠시 떠나게 된 것만도 잠시지만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매일 온 몸으로 선진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숱한 전쟁과 역경을 이겨낸 나라의 풍요로운 삶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경제사정이 순조로운 유럽연합 국가와 IMF 이후 힘겨운 우리나라가 비교되면서 의료보험제도가 오버랩 되었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숨 바친 유럽의 피의 역사가 되살아났다. 결국 의료계가 정부시책(의료보험제도)에 안이하게 대처한 탓에 현재의 상황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