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품 쏟아내는 만능맨
보통의 치과기공사들이 자기만족을 위해 때론 부당한 대우에서 벗어나 보다 당당해지기 위해 먼 타국인 필리핀으로 때론 남미로까지 유학을 가서 치과의사 면허증을 취득하는 마당에 치과의사가 치과 문을 닫고 치과기공소 소장이 됐다는 풍문은 기자의 귀를 솔깃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어떠한 연유에서 그런 엄청난(?) 결심을 하게된 걸까.
그러나 수소문 끝에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인터뷰 약속을 잡은 후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치과기공소가 아니라 뜻밖에도 서울대 관악캠퍼스 내에 있는 창업보육센터였다.
91년부터 93년까지 구리시에서 개원한 경력이 있으며 종합병원의 치과과장으로 재임키도 했었다는 전북치대 82학번 김병오 씨.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그는 학술부장이란 직책을 맡게되면서 도서관 관리를 하게됐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다양한 논문들을 접할 시간이 많아졌다.
이때 특히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CAD, CAM".
"IT 분야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 기공소에서는 언제까지 인공치아 제작을 위해 사람이 100% 수(手)작업을 해야하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그.
"CAD, CAM"을 이용해 인공치아를 생산해 내는 획기적인 일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이에 졸업 후 개원시부터 꾸준히 해외 견학을 통해 견문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이미 외국에서는 100%로 수작업이 아닌 기계를 이용해 인공치아를 생산하고 있음을 알게됐다.
이에 자극을 받은 그는 "CAD, CAM"을 이용, 외국의 생산수준보다 더욱더 업그레이드 되고 선진화 된 보철물 제작시스템을 만들어 보고자 결심, 지난 2002 서울대 창업보육센터 내에 덴탈그래픽이란 회사를 창립함과 동시에 보철물 제작을 위한 기공소도 차렸다.
그러나 치과의사만 해오던 터라 경영마인드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는 과거 나산그룹에서 기획실을 비롯 회사 경영의 전반 업무를 총괄했던 친형님인 김병수 씨를 대표이사로 영입하고 자신은 개발에만 주력코자 개발이사란 직함을 명함에 박고, "CAD, CAM"이용한 인공치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업에만 전념키 위해 지난 2001년 3월에는 치과의사로서 진료를 하는 것도 완전히 손을 뗐다.
"어렸을 적부터 호기심이 많고 발명에 관심이 많아서 시계, 라디오 할 것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분해를 하곤 했어요."
이러한 손재주 덕인지 현재 그는 유아용 두개골 교정헬멧, 표정 짓는 인형 등 10여 가지나 되는 발명품을 특허청에 출헌한 상태다.
그는 또 "최근들에 치아 및 두개골 조형물제작에 활용하기 위한 적층조형기계를 만들려고 프린터를 50대 가량이나 분해했다"며 머쩍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긴 하지만 치과의사였던 그가 기공소를 직접운영하게 되면서 느끼는 점이 많을 것 같다고 넌지시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대뜸 "예전엔 별로 못 느꼈었는데 기공소 입장에서 보니 기공물 단가가 왜이리 적은지? "라며 "기공소 소장이 돼서 기공사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기공사들에 애로사항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기공소를 차린 후 몇 번인가 보철물 제작 때문에 거래처 치과로 전화를 한적이 있었단다.
" 기공소입니다라고 했더니 치위생사가 전화를 얼마나 퉁명스럽게 받던지…."
자신을 기공사로 알고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던 거래처의 치과위생사나 직원들이 우연히 자신이 치과의사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나면 전화 받는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한 적이 있다는 그는 그럴 때마다 기공사라는 직업이 보다 존중 되어야겠단 생각을 했었다고.
인터뷰 말미에 그는 잘나가던 치과의사로서의 길을 접고 회사를 창업하고 기공소를 차리는 등 위험요소가 산적한 일에 메달리는 자신을 보고 왜 저럴까 하는 주위시선을 느낄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러한 시선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 지를 묻자 그는 "지금 하는 일들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성취감이 좋다"고 답했다.
단 개원시 보다 절반에 절반도 안 되는 월급쟁이 생활을 해야 하기에 가족들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강은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