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인생은 마라톤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사람이 일생을 산다는 것은 흡사 골인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 가듯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에서 쉽게 공감을 주는 말이다.
마라톤을 한 뒤로 한참 지나간 감동의 드라마속 주인공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마라톤 사상 가장 느린 시간을 기록하고도 가장 많은 격려와 찬사를 한몸에 받은 주인공 봅 윌랜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폭탄을 맞아 두 다리를 잃어버린 상이 용사로 뉴욕 마라톤 대회에서 뚝심만으로 장장 98시간 48분 17초를 기록, 1만 9천 413등에 맨 꼴찌를 차지했다는 얘기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건강한 다리와 좋은 신발로 경쾌하게 달리는 틈에 끼어 손바닥에 헝겊을 칭칭 감고 두 팔을 땅바닥에 짚어 물구나무로 달리기를 했으니 그 모습이 과연 어떠했을까?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억제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가 도착한 시간에는 마라톤 경기가 이미 끝난 4일이 지난 뒤였으며, 테이프도 없었지만 대회 본부는 이 집념에 찬 최종 주자의 골인을 축하하기 위해 다시 테이프를 걸었으며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백 명의 시민들은 함성과 함께 우뢰같은 격려와 찬사의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참으로 위대한 꼴찌이며 위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골인지점에서 자랑스런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성공은 출발에 있지 않고 끝나는 곳에 있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해냈다”라고 외쳤으며 두 팔로 뛴 최초의 마라톤 챔피언임을 온 세계에 선언했다고 한다. 어느 누가 감히 이 인간 드라마 앞에 얼굴을 들 수 있으며 누가 감히 고개를 꼿꼿히 세울 수 있겠는가.
사지가 멀쩡한 나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세상 살이가 고달프고 자기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고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져드는 일이 하루에도 몇번씩 우리 주변을 어둡게 감싸고 있는 오늘 이 인간 승리의 얘기는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취직이 안된다고 목숨을 끊고 카드빚 때문에 살인하고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어서 죽음을 택하는 이 허무하고 덧없는 현실속에서 불행을 불행으로 한탄하지 않고 절망과 좌절의 벼랑을 헤쳐오르는 장하고 엄숙한 생명의 찬가 앞에 과연 무슨 말로 경탄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곧 인간은 불행을 이기는 모습에서 강렬하고도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깊은 뜻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에 비유하면 맞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우리 청소년들은 지나치게 나약하고 허무주의적인 패배감각지수가 다른나라에 비하면 높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원인을 찾자면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점수에 의해 성장해가는 과보호와 의타적인 무기력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가장 감성적이며 민감한 시기인 고교시절의 3년을 高3病이란 열병속에 보내야하는 우리 청소년들. 그리고 大4病도 생겨나는 요즘 세대이고 보면 이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원인은 아무래도 사회 구조적으로 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치열한 점수 경쟁과 수능 시험 선수로 전락시키는 현상이라면 오늘의 패배 감각 지수야말로 어른들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젊은이들이 어떻게하면 절망하지 않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오직 절망보다 강한 집념을 키우는 일 뿐이다. “성공은 출발에 있지 않고 끝나는 곳에 있다”고 외친 두 발이 없는 봅 윌랜드의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