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심각한 정신상태를 드러내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시대의 병폐가 극에 달한 느낌이다. 흔히 이런 현상은 사회적 박탈감이 원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자족을 모르고 원망과 미움을 키워온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우연히 가구점에서 억대의 장식장이 판매되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세상의 불평등과 과소비라는 고정관념으로 이를 비난할 수도 있었겠지만 순간 ‘평등’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었다. 하나의 장식장을 팔기 위해 많은 손님들과 상대해야 하는 판매원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옷장을 디자인한 사람과 그것을 만든 수많은 손길들.
만약 그토록 공들인 물건을 값이 비싸다고 해서 아무도 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또 돈을 많이 가진 이가 절약한다며 고용을 꺼리고 소비에 인색하다면….
평등의 개념은 ‘고른 분배’와 결코 한 선상에 있지 않다. 진정한 평등은 각자 자기가 있어야할 자리에 정확하게 있는 것이며, 물건 역시 그것이 지닌 가치에 따라 정확하게 등급이 매겨지는 데에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일인데, 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코살라 국 국왕이 16가지 큰 꿈을 꾸고는 두려움에 떨던 중 부처님께 뜻을 묻게 됐다.
‘꿈에 이상하게도 튼튼한 소는 멍에를 씌우지 않고 어린 송아지에게 멍에를 씌워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어린 송아지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습니다.’고 왕은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미래의 일로 정의감이 없는 임금님이 나라를 다스릴 때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때에는 학식이 있고 덕망이 있는 큰 인물에게는 지위를 주지 않습니다. 재판관도 능력있고 법률에 밝은 사람을 내세우질 않고 용렬한 무리들에게 지위를 주어 재판을 하게 할 것입니다. 정치를 모르는 그들은 능력에 벅찬 사무를 마치 멍에를 벗듯이 벗어 던지고 말 것입니다. 한편 지위를 얻지 못한 능력 있는 대신들은 ‘이런 일은 내 소임이 아니다. 나는 문외한이다. 젊은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일을 기피할 것입니다. 결국 이는 나라에 손실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수레를 끌 수 없는 송아지에게 멍에를 씌우고 힘세고 튼튼한 소에게는 멍에를 씌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왕이 다시 말하길 “이번에는 암소가 금방 태어난 새끼의 젖을 빨고 있었습니다.”하니 부처님께서는 “그것은 장래의 사람들이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징조를 나타낸 것입니다. 장래의 사람들은 부모나 시부모를 섬기지 않고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하며, 옷이나 밥도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주지 않습니다.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어쩔 수 없이 자식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마치 늙은 소가 금방 태어난 송아지의 젖을 빠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고 설명하셨다.
이것이 어느 미래를 지칭한 것인지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여서 인용해 보았다. 가치가 전도되고 물질에 편중된 이 시대에 평등한 사회, 올바른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평등관부터 바로 정립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10만원을 냈다면 10만원 어치를 받고 1만원을 냈다면 1만원 어치를 받는 것이 평등이며, 각자 자기 그릇에 맞는 자리로 가 있는 것이 평등일 것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 이것이 평등이며 평등사회를 구현하는 첫걸음인 동시에 전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