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10)]입치사 제도의 문제점

관리자 기자  2004.09.16 00:00:00

기사프린트

그러나 일제는 그들의 침략정책에 동참한 입치사들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입치사 허가는 무제한적이었고, 단속도 관대하여 자유롭게 치과진료를 하게 했다. 이것은 일본 내에서는 허가하지 않는 입치사를 한국에서는 허용하는 일제의 모순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입치사는 치과의사가 배출되기 전까지 과도기적으로 근대의학을 수용한 치과의료인이라 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뿐 아니라 입치사는 사회적으로 우대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수입도 상당했다.
그러나 입치사가 증가되자 좋지 않은 유행도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인 구강 상태는 양호하였다. 한국인은 금으로써 보철하는 것을 기피하였으므로 대개 의치(義齒)의 고리조차 눈에 잘 띠지 않도록 백금을 사용했다. 의치를 장착한 사람도 의치가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은 보철하기를 기피했다. 그런데 심각한 유행이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의 민중의 구강위생사상은 전연 없었고, 소위 돈푼이나 있는 부자, 또는 모양내는 멋쟁이, 또는 기생들이 보건 목적이 아니라 장식적 목적, 즉 장식도구로 알고 뻗내기 위하여 중절치 측절치 등 건전한 치아에 금으로 전부 금관 또는 개면금관을 해씨우고 뻔적뻔적 거리며 다니는 것이 현재 ‘다이야’반지나 끼고 다니는 정도로 유세하였고 일대 유행이 되었다. 이 유행은 상당한 시일 동안 근 20년간이나 그러한 악풍이 있었다.”
즉 구강위생은 고려하지 않고 장식용으로 보철을 하는 풍조가 생겼다는 것이다. 입치사들이 주도하던 20 여년간 그러한 풍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노다 오지(野田應治)치과의원에 투석하던 시기 이후 불과 10 여년만의 일이었다. 또한 양적인 팽창에 비해 진료에서는 불량 보철을 시술하는 등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


“잇방”이라 하여 젊은 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이것이 소위 입치들이 하던 “칫과의원”을 말하는 그 시절의 말이다. 지금도 늙은 연배의 분이 치과에 관해서 상식 이하의 그릇된 치과에의 인식을 가지고 또 많은 분의 치아가 좋지 못하다는 하나의 큰 원인은 바로 “잇방”이라는 데에서 오는 인식과 그 젊었을 시절에 이러한 곳에서 마구 좋은 치아를 버려 놓은 데 있다고 본다. 
즉 입치사들이 치료한 치아가 결과적으로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입치사는 학문적인 뒷받침이 적어 치과의사에게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치사와 치과의사 사이에는 잦은 마찰이 생겼다. 일본인 치과의사의 지도자였던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나 시메우찌 켄세키(注連內堅石)는 입치사의 단속, 제도의 폐지를 바랬다. 그리하여 이사청에 있는 미우라 지고로오(三浦彌五郞) 이사관에게 입치사들의 문제를 자주 언급했으며, 또한 나라자끼 도오요오와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이 경성치과의사회의 대표로서 이러한 문제를 관계 당국에 호소했으나 전국적인 대표로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입치사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자 행정적인 도움을 얻기 위하여 조선치과의사회 설립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