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는 이른바 땡전뉴스라는 것이 있었다. 저녁 9시 시보가 울리자마자 TV 화면에는 근엄한 표정의 권력자가 등장하여 아랫사람들을 굽어보는 장면이 나타난다. 대개는 임명장과 같은 것이 전해졌는데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굳이 한손으로 그걸 전해주던 태도와 표정이 무척이나 가증스럽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폭압으로 정권을 잡은 정부가 으레 그렇듯이 정권에 대한 비판은 철저히 탄압되었다. 어떤 연기자는 그 권력자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방송출연이 금지되었으며 술 한 잔 하고 택시에서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곤혹을 치러야 했던 민초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중에는 그러한 근엄한 권위와는 딴판으로 그를 비웃는 많은 우스개 소리가 만들어지고 유통되었다.
고스톱 시리즈에서부터 아이큐 기계에 이르기까지 그를 비웃는 이야기의 레퍼토리는 끝이 없었다. 대학가에서 권력층을 비웃는 탈춤이 크게 유행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러한 폭압과 저항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참여와 비판의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상대방을 비판할 수 있는 표현매체의 종류와 방법이 다양해지면서 가히 패러디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 대상에 있어서도 연예인이나 여야 정치인에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그리고 사회 현실과 문화현상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표현 방식도 무척 섬뜩하다. 신체부위를 마음대로 해체하여 재구성하기도 하고 유행하는 영화의 스토리에 빗대어 은근한 감정을 북돋우기도 한다.
패러디는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이나 감상하는 사람의 억눌린 감정이 발산될 수 있는 출구를 만들어줌으로써 심리적ㆍ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의 특정한 성격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전체적 맥락을 무시하고 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허구한 날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독설로 날을 지새우는 정치권이 이러한 표현방법을 오용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이전투구의 나락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정치권을 비웃고 조롱할 수 있는 것은 참정권이 보장된 국민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웃음과 조롱의 국민 정서를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집단이 악용하는 것은 경계해야한다. 자기 당의 대표가 패러디에 등장한 사건으로 발끈했던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연극배우가 되어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퍼붓는 사태는 그 자체가 3류 코미디이며 후진적 정치의식의 반영이다. 풍자와 패러디는 달리 강력한 표현수단을 가지지 못한 민초들의 억눌린 정서의 표출일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치인끼리의 정쟁의 수단일 때는 이미 그 빛을 잃은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디는 민초들의 억눌린 정서를 표출할 수 있는 통로일 뿐 아니라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의 창이기도 하다. 때문에 한 컷의 작품 속에도 수많은 시대의 맥락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고, 그 시대 그 장소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정서를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패러디는 누군가에게 가졌던 기분 나쁜 감정을 일시에 쏟아놓는 일방적 배설행위가 아니며 더군다나 그런 행위를 통해 당파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이어서도 안 된다.
지금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있는 패러디는 신분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꾸짖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탈춤의 미학과 부도덕한 정치권력을 비웃으면서도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우리 현대사의 경험 속에서 탄생한 우리 나름의 표현양식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 저급한 언어로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을 수도 있는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속성을, 은근하면서도 통렬한 꾸짖음을 담은 건강한 패러디의 기본 성격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