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태(咸錫泰)는 치과의사규칙에 의하여 치과의사 면허 제1호로 등록된 치과의사였다. 그는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 면허를 허가받았고, 이러한 사실이 그해 3월11일 관보에 게시되었다.
1889년 함석태는 평안북도 영변군 오리면 세죽리 부유한 집안의 독자로 태여 났다. 함석태는 강릉 함씨 희천파로써 부친은 함영택(咸泳澤)으로 성균관 진사(進士)와 의관(議官)을 지냈다. 이러한 직책에서 알 수 있듯이 함석태의 집은 지방의 재력에 기반을 둔 향반이리라 추측이 된다.
고향에선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녔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니까 상당히 부자였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함석태가 당시 특별히 생소한 학문이었던 치의학을 택한 것은 그의 집에서 학교와 교회을 세우는 등 사회사업 할 때의 견문이 작용했을 것이다. 함석태의 집은 학교와 교회을 세우는 등 사회사업을 하며 문명·개화에 관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석태는 유복하고 개명된 집안에서 자랐고, 1909년 이전에 일본 동경에 유학하였다. 함석태는 당시로는 특별히 생소한 학문이었던 치의학을 택한 것은 그의 가문에서 학교와 교회을 세우는 등 사회사업 할 때의 견문이 작용했을 것이다.
함석태의 일본치과의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교육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일본치과의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갖추었으리라 짐작된다. 1912년 그는 인정과 제2회 졸업생으로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7년 6월 설립 시 일본치과의학교의 수업은 2년제였으나, 1909년 8월 전문학교령에 의한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는 3년제로 승격하였다. 함석태는 1909년 8월 이전에 입학한 것 같다. 왜냐하면 재학생은 인정과로서 수업을 받았고, 전문학교령에 의한 3년제로 승격된 후 입학한 학생들은 지정과로서 수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함석태는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으나, 한국은 치과의사로서 활동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금의환국을 바랬으나 조선사회는 치의학에 대한 이해가 없어 개업을 해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이비과(耳鼻科)를 더 전공하고 돌아가려는 생각으로 1913년 말까지 동경에 머물렀다.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 교장 나카하라 이치고로(中原市五郞) 등은 ‘일본과 조선은 치과의 발전이 완전히 일치하므로 조선은 장래가 유망하리라’는 격려를 받고 돌아 왔다.
1914년 6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가 개업을 하게 되었다. 그는 개업 안내에 ‘무료수술‘을 광고하고 있었다. 이것은 입치사와 차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가 수술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기에 개업의 방편으로 ‘수술무료’를 안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수술무료’는 발전하여 1924년경에는 치과와 동등하게 구강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함석태
는 일반적인 치과진료를 하면서 구강외과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개원한 이래 함석태는 치과의사라는 직업의 어려움과 한국인들의 위생관념부족을 절실하게 느끼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당당하게 치의학에 대한 사회에 인식을 환기시키는 것과 후진의 앞길을 열어주는 일에도 책임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 치과의사로서의 사회에 봉사가 되는 일이라면 어떠한 노력도 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1914년경 함석태가 개업하고 있을 때의 서울의 치과계 상황은 일본인 치과의사 4명과 미국인 1명이 개업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인 입치사들이 통제가 없는 한국으로 이주하여 입치사 수는 치과의사의 몇 배에 달하였다. 한국인 입치사들도 3~4 명이 개원하고 있었다.
함석태가 개업한 후 1917년 한동찬(韓東燦)이 동경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개업하였고, 1919년 김창규(金昌圭)가 동양치과의학전문학교(현 일본대학 치학부)를 졸업하고 광화문에서 개원을 하였다. 1921년 이희창(李凞昌)이 함석태와 같은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