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치사 코모리의 경우 적지 않은 치료비를 받았다. 광고에서 보여지는 치료 내용과 가격은 다음과 같았다. 백금 충전은 1원부터 5원까지, 순금 입치는 2원부터 10원까지, 도기총입치는 6원부터 10원까지, 은충전은 50전부터 1원까지, 도기입치 1매 1원 이상이었다.
진료비에 있어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일관성이 결여되었다. 1905년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의 봉급은 98원을 받으며 고위층 인사를 별도로 치료하고 있었다. 1907년경 이이쓰까 데쓰(飯塚徹)의 경우에는 금관 소구치가 12원, 금관 대구치가 15원을 받을 때, 일본인들의 한성병원에서는 15원과 20원이었다. 그러나 학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의 경우에는 총의치를 장착하고 300원을 지불하기도 했으며, 내무대신 부인의 경우 심한 덧니를 삭제하고 이어 붙이며 500원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1914년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가 총독부의원에 왔을 때 금관 소구치와 금관 대구치가 7원과 8원이었고 금관계속가공의치의 경우에는 25원 그리고 1회 치료비가 20전 정도였다. 1912년경에 급료는 치료와 기공을 겸할 수 있는 대진이 30원, 치과의사는 60원 정도였다.
1926년경의 한국인 치과의사 생활수준은 중상(中上)이었다. 이것은 경성제대 졸업자의 봉급보다는 수입이 많았다. 안종서의 경우에 그는 세브란스를 사직하고 빠고다공원 뒤에서 2~3개월 개업을 하다가 곧 천진으로 갔다. 빠고다공원 뒤 2층 기와집에서 개업을 하니 첫 달 수입이 700엔이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일반 의사들도 벌 수 없는 거액이었지만 나로서는 그래도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호곤(李鎬坤)의 경우 1926년 진남포에서 하루 평균 12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했는데, 그의 진료 내용은 발치, 치료, 보철로 크게 나누어진다. 발치료 50전, 치료비 20전, 금관 3-4원, 총의치 15~20원이었다.
이후 이호곤은 1935년 평양으로 개원지를 옮기며 시설도 확장하였다. 그의 진료 내용은 발치, 치료, 어느 정도 분화된 보철 치료를 볼 수 있고, X-ray 촬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루 평균 20명 정도를 진료하여 발치료 80전-1원, 치료비 30전, 금관 5원, 총의치 15-30원, X-ray 1매 50전이고 월수입은 300원 이상으로 생활수준은 상류였다고 하였다.
1940년대는 치료 내용이 좀더 다양해졌음을 살 필 수 있었다. 발치, 처방, 근관치료, 치아주위조직질환, 병리검사, 다양해진 보철 치료, 그리고 X-ray 촬영이 행하여졌다. 1942년 경성치과의사회 표준요금 규정에서 보이는 진료 내용과 수가는 다음과 같다. 발치료 영구치 2원 이상 20원 유치 1원 이상 2원, 치료비 첩약료 1치 50십전 이상 3원, 치수처치료 1치 1원 이상 3원, 근관충전료 1치 1원 이상 3원, 치조농루처치료 1회 1원 이상 5원, 치아청소료 3원 이상 5원, 이학적료법료 1원 이상 5원, 구강염처치료 50전 이상 5원, 백금관 40원 이상 200원, 금관 25원 이상 50원, 합금관 10원 이상 20원, 총의치 전부상의치 50원 이상 200원, 국부상의치 1치 7원 이상 (1치 증가에 따라) 5원 이상 10원, 금속상의치 300원 이상 2000원, 금속상국부의치 1치 30원 이상 200원, X-ray 1매 1. 렌트겐 진사료 3원 이상 15원이었다.
출처: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