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에 서양의 근대문물의 수용은 중요 과제였다. 그 중에서 의학교육이나 치의학교육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중대 분야였다. 한국에서 치의학교육은 한대위가 처음 시도했다.
1909년 7월 서울에서 치과의사 한대위(韓大衛, David Edward Hahn, 1874-1923)가 치과의학교 설립 계획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는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6년 1월 한국 서울에 와서 최초로 주재하면서 치과진료소를 개설한 선교 치과의사이자 구강외과의사였다. 대한매일신보에 의교 창립이라는 기사와 논설, 그리고 ‘한국평론(The Korean Review)』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이고 있다.
“醫敎 創立,
미국 치과의사 한대위씨가 경성 남대문 내 자기 사택에 齒醫학교를 병설하고 한국학생을 교육하는데 此학교서는 장차 남문외 제중원과 연합병원 할 터이오 학원의 신건축이 充備되면 此학교는 학원 내에 移附하고 또 학원에는 치과부를 증설한다더라. 韓大衛氏의 學校設立을 賀하노라”
서울은 주재하는 치과의사 한대위가 온 것은 축하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몇 가지 질이 안 좋은 소문이 떠도는데 그것은 치료비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과는 개인적으로 먼 거리에서 관찰된 일인 것이다. 상주하는 치과의사로서 출장 온 치과의사보다 더 싼 요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일이 제대로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한은 치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려고 심사숙고하고 있다. 이 책의 다음 나는 좋은 치과의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교회의 청년들을 데리고 있다. 나는 청년들이 한국에서 전문인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 우리의 교육적인 작업이 치과과정과 연결되도록 고려하고 있다.
즉 한대위가 본인 사택에 치과의학교를 설립하고, 한국학생 교육을 시도하는 가운데 이 학교는 장차 제중원과 연합할 것이고 건물이 마련되면 제중원 치과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치과의사 한(Hahn)이 서울에 주재하러 온 것은 축하해야 할 일이다. 불행하게도 치료비가 비싸다는 말을 듣기도 했으나 비싸다는 것은 치료에 품질에 있어서 우수하므로 잘못된 일이다. 1900년의 일개월간의 하숙비가 20원에서 30원 할 때에 쌀은 한 되에 16전에서 28전이었고 일본 의사의 진단료는 일회에 5원이었으나 영국이나 미국의 의사는 5원에서 10원을 받았다. 의사의 왕진료는 일본인 의사는 60전에서 1원을 받았으나 구미 의사는 5원에서 10원을 요구하며 교통비는 별도로 요구하기도 했다. 한(Hahn)이 치과의학교를 설립하려 심사숙고하고 있다. 다음에는 구체적인 것이 대중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통감부의 한국 식민지 보건의료정책에 의해 한국인을 위한 한대위의 치과의학교 설립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은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할 계획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중원의 의학교육에 이어 치의학 교육에 있어서까지 미국에게 기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출처: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