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떤 깊은 산속에 노스님이 어린 상좌와 함께 살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속인데다, 스님은 마음씨도 너그러워 하나밖에 없는 상좌를 아주 예뻐 하셨다.
상좌가 어떤일을 하든 그저 너그럽게 좋다만 하시니 상좌의 버릇은 점점 나빠졌다.
음식이 남아 처리가 곤란하면 냉큼 버리기 일쑤고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도 맛있고 좋아 보이면 스님 몰래 먹어 버렸다.
어느날 상좌는 부처님께 올릴 두부를 부치다 어찌 맛나게 보이던지 그냥 입속에 넣었다.
그때 스님이 불쑥 부엌으로 들어오셨다.
상좌는 들키지 않으려고, 금방 지진 뜨거운 두부를 씹지도 못하고 그만 덩어리째 꿀꺽 삼켜 버렸다. 그러다가 기도가 막혀 그 길로 상좌는 죽어버렸다.
“내가 박복해서 상좌가 먼저 죽었구나”
상좌를 묻고 너무 괴로워하시던 스님은 그 암자를 떠나버렸다.
그 후 이곳저곳을 떠돌던 스님은 인연이 지중한지 다시 그 절을 지나치게 되었다.
10년전이라 하지만 마치 어제 같은지라 스님은 정답게 상좌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아무개야”
“예, 스님 이제 오십니까?”
순간 머리끝이 쭈빗해진 스님이 눈을 크게 뜨고보니 앞에 죽었던 상좌가 서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스님 어디갔다 이제 오십니까? 제가 스님을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세요”
어서 방으로 드세요, 제가 얼른 공양상 차려 올리겠습니다.”
상좌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간 스님이 정신을 차려 보니 방안에는 10년 먼지가 쌓여 있었다. 살짝 공양간을 살펴보니 상좌는 키득거리며 부엌안을 분주히 왔다갔다하더니 녹슨 솥뚜껑을 열어 입을 벌리더니 무언가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자기가 스님의 눈을 피해 훔쳐먹었던 것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고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이엇다.
매우 놀란 스님이 가만 귀를 기울이니 “이거 한그릇 먹으면 제 놈이 안죽고 배겨?”
“아, 내가 아귀 귀신에게 끌려 왔구나”
스님은 그 길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달아났다.
부엌에서 나온 상좌는 스님이 없어진것을 알고 뒤를 쫓았으나 스님이 산문을 벗어나자 더 이상 쫓지 못하고 주저앉아 통곡을 하였다.
“스님 스님, 저는 여기서는 이제 한 발짝도 못 갑니다, 이곳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제가 이리 아귀귀신이 된 것은 다 스님 때문입니다.
왜 스님은 저를 야단쳐서 가르치시지 않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셨습니까?
그 때문에 저는 편하고 쉽게만 살다보니 남모르게 죄를 많이 지어 이리 아귀귀신이 되었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겨 천도재를 지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오냐, 알았다 내가 잘못해서 네가 그리 되었다니 네 소원대로 해 주리다.”
스님은 약속대로 공부하는 스님들이 계신 절로 가서 상좌를 위해 정성껏 천도재를 지내주었다.
이것은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무엇이든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주거나 이기적으로만 키우게 되면 현세뿐 아니라 죽은 다음까지 함께 괴로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다.
속담에 ‘귀엽게 기른 자식이 어미를 꾸짖는다’는 말이 있다.
대개 집안의 자식은 어릴때부터 미리 가르치고 억제하지 않으면 자라서 반듯이 방자해지고 방자함이 지나치면 부모를 꾸짖게 된다. 그러니 이것은 자식뿐만 아니라 자식을 이렇게 만든 부모의 잘못도 큰 것이다. 대개 학교는 개인의 소질과 재능을 길러 주는 곳이고 사람을 올바르게 만들어가는 예의범절은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보편적인 교육의 추의라 할 수있다. 자식에게 당근과 채찍을 능숙하게 잘 다룬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자식을 다루기에 앞서 내 안의 자생중생들부터 잘 다룰 줄 아는게 가장 시급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