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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 차 한잔의 사색>
그 잔디밭에 심은보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관리자 기자  2001.04.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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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억지’는 인간 사회의 가장 자연적인 생활 형태인가, 아니면 지구촌에서 극소수 민족이나 나라의 특별하고 인상적인 성향인가? 얼마 전 이 나라 경제의 거목이었던 현대 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설’같은 일화와 성공담을 많이 남겼고,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전달되었다. 그가 사업을 일으키기 시작하던 때의 ‘보리밭 잔디’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유엔군 묘지 조성 공사를 맡게 되었을 때, 겨울에 푸른 잔디를 구할 수 없자 싹이 오른 보리밭을 통째로 퍼오다시피 하여 묘지를 푸르게 단장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며 그가 원하던 비전을 하나하나 이루었던 그의 삶은 사막과 바다의 현장에서 역사를 만들어 간 비범한 인간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개인사를 더듬어 볼 때 다음 세대가 꼭 극복해야만 하는 점도 있다. 예컨대 그 당시 유엔군 묘지 조성을 위해 잔디 대신 심었던 보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몇 달 푸른색을 유지하기 위해 두었다가 봄이 되어 다시 ‘진짜’ 푸른 잔디를 구해 바꾸었든지,또는 보리가 시들 즈음에 또 다시 기상천외의 묘안으로 그 푸른 색깔을 유지하는 방법을 개발했을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 문제는 당신들이 만든 ‘당신들의 천국’에서는 이 일화가 성공 후의 미담으로 세간에 오르내렸겠지만, 그 자손들의 세대가 성장하며 꿈꾸는 ‘우리들의 천국’에서는 그런 사회의 분위기가 흡사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업보처럼 극복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로 남아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조금만 하여도 우리는 상식과 합리적인 방법보다는 억지와 우격다짐 내지는 일종의 비합리적인 밀어 부치기가 더 잘 통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현실에 당황하게 된다. 이러한 ‘억지’는 인간 사회의 가장 자연적인 생활 형태인가, 아니면 지구촌에서 극소수 민족이나 나라의 특별하고 인상적인 성향인가? 어찌 보면 가난했던 민족의 부의 창출의 과정에서는 이렇게 억지를 부리더라도 단시간 내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우리 민족의 역사 속의 필요악들은 이제 사람들이 생존보다는 복지와 인간적인 삶을 이야기할 때에도 도처에서 숨죽이고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한 예는 멀리 있지 않다. 사람들 간의 법조문에 의거한 계약서나 동업자들과의 사업상의 약속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 앞에서는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피부로 느낀다.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는 의사 사회의 공동 개원의 경우에도 사정상 누군가 탈퇴를 하게 될 때 계약서에 명시된 약속은 무시하고 투자비에 대한 웃돈을 요구하거나 심지어는 시정잡배들의 ‘자릿세 뜯어내기’방법처럼 폭언, 폭행을 하며 자신의 요구사항을 동료 의사에게 강요하는 바람에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의학 교육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이 억지 부리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우리는 학교에서의 ‘선한 가르침’보다는 사회에서의 ‘악한 가르침’에 더 좌우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뒤를 잇는 건설 문화의 후예들도 예전의 성공 방식을 따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치명적인 대형 사고들을 만들어 냈는데 대표적인 예가 삼풍백화점의 붕괴일 것이다. 요즈음 들어 이 붕괴 자체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수백 명의 영혼과 우리 민족의 상처가 있는 이곳을 기념하자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수천억 원의 적자를 이유로 이 땅을 사기업에 매각하였고 기업도 이윤의 창출을 이유로 고층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이 침략이 잦은 나라에 우리가 밟는 땅 어디나 억울한 사연을 지닌 선남선녀가 묻혀 있을 수 있어서 꼭 그곳만이 의미 있는 장소는 아니겠지만, 우리 민족의 먼 미래와 비전을 지니고 정책이 이루어졌다고 하기에는 왠지 예전의 그 공원묘지의 보리밭처럼 눈앞의 해결책과 자본의 확충을 위해 즉흥적이고 억지 섞인 결정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정부의 최종 결정은 그 사회의 문화와 전통의 총체적인 이정표가 되고 국민은 싫든 좋든 그 방향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스스로가 지닌 억지와 적당 주의의 상처를 안고 삼풍백화점 터에 짓고 있는 고층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며 운전대를 잡고 ‘그저’옆을 스쳐 지나다닐 것이다. 우리가 가꾸는 ‘우리들의 천국’에는 분명 원칙과 합리성이 인정받고 통하는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해본다. 세상에 적절히 적응하여 사는 우리들 가슴에 고인 이 약간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은 멀지만 놓치지 않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