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요령 있게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프로크루스테스를 죽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의 부활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인가 ?
학창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다 보면 그 무한한 상상력과 신들의 실타래처럼 엉킨 사연들에 빠져들곤 하였다. 요즈음 들어 이윤기의 탁월한 문장으로 재해석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읽다 보면 재미있게도 그 신들의 이야기는 곧 인간들의 사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인간들이 이루어내는 이야기는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누가 그러셨더라 ?
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악명 높은 도둑이 나온다. 이 도둑은 나그네가 지나가면 자신의 집으로 불러 들여 침대에 눕히고는 나그네의 키가 침대 길이 보다 길면 몸의 일부를 그에 맞추어 잘라서 죽이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몸을 늘려서 죽였다고 한다.
무조건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을 뜯어고치거나 자기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하는 것은 이에 연유한다. 남편, 친구, 직장 상사, 동업자,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여자 할 것 없이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많이 떠올리는 사람은 남들에 비해 힘들게 인생을 살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우리나라의 의사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이 비정한 침대를 만나는 시기는 아마도 수련의 시절일 것이다.
깍두기 머리를 하고 서열별로 앉아있는 일명 조폭(조직폭력배)들처럼 순서가 정해져 있는 사회에서 불합리한 커리큘럼을 내밀고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할 때, 더군다나 머리가 빈 윗년차나 교수가 비서 부리듯 하며 전공과 상관없는 담뱃불 붙여드리기, 민방위 훈련 대신 가서 출석하기 등의 ‘비합리적 침대’를 들이대며 그에 맞추도록 요구하면 어린 마음에 당황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며 인생을 배운다.
그래서 흔히 수련 과정을 전공 공부 외에도 여러 인간성을 배운다 하여 ‘휴먼 트레이닝’이라고 듣기 좋게 부르는 이들도 있다.
얼마 전 친구가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하기 전에 주방 공사를 하였는데, 그의 아내가 아무리 공사하는 업자에게 원하는 싱크대의 모양, 높이를 얘기하여도 제대로 맞추어 제작하지를 못하여 애를 태운 적이 있다.
그러자 그녀에게 누군가 ‘나에게 주방을 맞추지 말고 주방에 나를 맞추도록 노력하라’고 하였다는데 확실한(?) 충고일 수 있겠다.
이처럼 우리는 사회생활 도처에서 만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목격하며 몸이 잘리거나 늘려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미리 그 침대 사이즈에 맞추어 움츠리거나 길게 하여 생존하는 법을 배운다.
‘알아서 기어라’라는 군대 용어가 이를 대변하듯 극단적인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성향이 더 심할 것이다.
숱하게 바뀌는 ‘교육 정책의 침대’에서 겨우 살아남은 우리는 이제 ‘정부 시책의 침대’, ‘의약 분업의 침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을 줄이거나 늘린다.
이 사회의 생존의 법칙을 배워가는 우리는 요령 있게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프로크루스테스를 죽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의 부활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인가 ?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침대들이 우리 아이들 세대에는 과연 더 지내기 편한 침대들로 바뀌어 질 수 있을지 희망 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orthodaniel@hanmail.net)
문화복지위원회
문·화·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