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나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성인 사회 일각의 아픈 자정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리고, 이제는 스승이란 없다’고 스승에 대해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는
‘무심한 세대’가 새로운 인류로 자라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듣는다.
치열했던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합격하였을 때 입학식장에서 우리를 맞아주시던 총장님의 모습은 지성의 상징이었고 스무 살의 내게는 최고의 선(善)으로 보였다.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하셨기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교의 총장을 지내실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과 함께, 그 검은 가운의 이미지는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기억에 새겨져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를 받쳐준 힘으로 남아 있다.
그 입학식장에서의 총장님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몇몇 총장님들은 저서를 통해서나 주위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과 이름을 접하게 되었고, 그 분들의 개인사에 대하여 더 관심 있게 바라본 적도 있다. 유명 가수를 좋아하는 팬처럼 좋아하는 총장님의 학업에 대한 에피소드, 현재의 활약상 등을 재미있게 추적해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좋아하던 총장님들은 지금 갖가지 수모를 당하고 몸고생, 마음고생을 하셔서 마음이 시리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중에 한 여자 주인공이 있어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래서 그 여자는 일부러 좋아하는 사람을 멀리하며 지냈었는데, 그 여자의 슬픔이 이런 것일까? 혹시 나도 그 여자처럼 어떤 주술이 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그 중 한 분이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님이다. 탁월한 과학자로서 미국 NASA(항공 우주국)에서 활동하시다가 한국의 교육에 대한 비전을 지니시고 신흥 대학을 최고의 대학으로 일으키려 하신 분으로, 한동대학교는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서 독특한 교육 방식과 첨단의 연구로 단기간 내에 국내 굴지의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 총장님이 얼마 전 불행히도 업무상 횡령과 교비 전용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학자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돈에 눈이 어두워 공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의혹은 정황으로 보아도 설득력이 없다. 얼마 전 5월 15일, 스승의 날에 그가 구속 수감되어 있는 경주 구치소 앞에는 2000명에 가까운 학생과 교수, 학부모들이 카네이션을 들고 스승을 기리는 모임이 있었다. 살벌하고 적막하기까지 한 구치소의 굳은 문 앞은 제자들의 눈물이 담긴 빨간 카네이션으로 덮였다.
죄의 여부를 떠나서 김영길 총장님은 행복한 스승이다. 그가 스승으로서의 진실한 면모가 없었다면 수많은 제자들이 ‘눈물의 카네이션’을 들고 그곳에 서있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스승으로서의 사랑과 헌신은 그 일 하나만으로도 빛난다.
대학 총장과 교수들을 처음 접한 입학식 이후로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면 자기 쇼윙(showing)에만 강하거나, 학문에 대한 열정보다는 자기 영역 넓히기와 서열 상승에 대한 집착으로 일관하던지 명예만 유지하며 시간만 때우는 고급 한량 같은 교수들이 많았던 것을 알겠다. 또한 총장이라는 자리가 학문의 깊이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세간의 법칙도 알게 되면서 귀한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도처에 많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스승이나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성인 사회 일각의 아픈 자정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리고, 이제는 ‘스승이란 없다’고 스승에 대해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는 ‘무심한 세대’가 새로운 인류로 자라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듣는다.
이런 흐름은 진정한 스승이 되기를 열망하며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는 젊은 예비 지성인들에게는 큰 절망일 것이다. 그들은 한 위대한 학자이며 선망의 대상인 총장이 콘크리트 벽을 앞에 두고 구치소에서 차가운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허탈과 분노를 느낄 것이고, 위대한 대한민국의 현직 교수들은 연구와 교육 이전에 ‘어떻게 해야 정년까지 구속되거나 다치지 않고 지낼 수 있는가?’에 대하여 더 고민을 해야 할 운명에 처해있는지도 모른다. 구치소 앞에 놓여진 총장님을 위한 카네이션을 보며 진정한 스승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
(orthodani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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