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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 차한잔의 사색>
현대의 동심(童心)

관리자 기자  2002.06.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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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동심은 아파트의 언저리에서만 맴돌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리는 슬픈 각본을 지녔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오늘은 일요일, 오랜만에 늦잠이라도 자볼까 싶어서 거실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도 이불을 둘둘 말며 더 잠을 청하는데 아내가 일어나라고 성화다. “무슨 일 있어?” 물으니 큰 아이 영어 선생님이 오늘부터는 일요일 오전에 집으로 오신단다. 워낙 유명한 선생님이라 시간을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일요일 오전이라도 아이를 가르쳐 주십사 사정하여 오시는 것이라고 한다. 아니, 평일 내내 배우는데 일요일에 또 배워야 돼? 눈을 비비며 마지못해 일어나 앉는다. 요즈음 아이들의 생활의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고 저 아이의 동심은 어떻게 형성이 되어 가고 있는가 걱정이 든다. 작가 박완서님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그녀가 어렸을 적의 기억을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농사꾼이 곡식이나 푸성귀를 씨 뿌리고, 싹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제아무리 부지런히 수고해 봤자 그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돼 가는 부산함을 앞지르지 못한다.’ 또한 그녀는 어릴 적에 느꼈던 ‘순수한 비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그 비애를 느끼고 울어버린 동심을 요즘의 아이들이 짐작이라도 할까. 얼마 전 개봉된 영화 ‘하트 인 아틀란티스’에서도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린 한 남자가 지금은 폐가가 되어 버린 고향집을 찾아가 11살 아이 적의 기억을 되새긴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친구들과 물가와 나무 위에서 천진하게 떠들며 웃던 시절로 장면이 흘러간다. ‘샤인’의 감독이었던 스콧 힉스의 섬세함으로 그려진 회상에서는 누구나 눈가를 적실 동심이 손에 잡힐 듯하다.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의 장진영과 이정재의 모습을 보면 잊었던 옛 애인이 떠오른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써클룸과 젊음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의 모습. 그것은 애인에 대한 직접적인 회상이라기보다 스무살 적 지녔던 순수함에 대한 추억이다. 어릴 적 깨끗한 동심이 이어져 지순한 사랑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나이가 들며 쉽게 그 순수함을 잃을 때가 많다. ‘오버 더 레인보우’를 보기 위해 메가박스 매표소에서 중년의 여성 둘 앞에 서게 되었다. 두 사람은 김치 담근 얘기를 하다가 드라마의 신성우가 멋있더라는 얘기를 마이크 잡은 듯 떠들다가 내 차례가 되자 기어이 나를 밀치고 먼저 표를 끊는다. 팔 힘이 꽤 센지 속절없이 뒤로 밀린다. 이 예절 없고 거친 중년 여성들도 예전엔 지순한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의 동심과 순수함은 어떻게 형성이 되고 있을까. 대도시의 콘크리트 위에서만 생활하는 아이들을 위해 자연 학교니, 계절 학교니 하여 시골의 학교 교정에서 몇 일을 지내는 프로그램에 보내기도 하고 막히는 교통 체증을 무릅쓰고 도시의 외곽으로 벗어나 ‘하늘에는 사실 저렇게 별이 많단다’하며 별자리를 일러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동심은 아파트의 언저리에서만 맴돌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리는 슬픈 각본을 지녔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orthodaniel@hanmail.net 문화복지위원회 문·화·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