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고(迎鼓)와 케이팝 데몬 헌터스

  • 등록 2025.09.03 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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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광식 칼럼

1983년 3월에 국립중앙박물관의 박물관회에서 운영하는 박물관대학(박물관 특설강좌)에 7기로 입학했다(올해 48기 입학). 역사학, 인류학, 고고학, 미술사, 사상사, 과학사 등 50여 개 과목을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빙해 강의를 하는 주 4시간씩 10개월간의 알찬 수업이었다.


한 강사분이 한중일 삼국의 문화특징을 단적으로 이야기 하는데, 한국은 술문화, 중국은 음식문화, 일본은 목욕문화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음주가무가 끊이지 않는 민족이라고 하면서 미구에 세계의 연예계를 이끌 것이라고 예언했다. 40여 년 전 당시의 우리나라 영화계, 가요계, TV 및 라디오 연예 프로그램 등의 상황을 볼 때 ‘과연 그럴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면서도,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전거를 보았을 때 ‘일말의 희망을 가져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원 전후, 우리 조상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사서(史書)를 참조하는 경우가 많고, ‘이십사사(二十四史; 중국 역대 왕조에서 공인된 정사 24권)’ 중 특히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이나, <후한서 동이열전(後漢書 東夷列傳)을 많이 참조하게 된다. 삼국지는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짓고 유송(劉宋)의 배송지(裴松之)가 주를 달아 보충한 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서로,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다.

 

“은력(殷曆) 정월에 지내는 제천(祭天)행사는 국중대회(國中大會)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하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길에 다닐 때는 낮에나 밤에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行道晝夜無老幼皆歌, 通日聲不絶]”<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夫餘條)>

 

부여의 은력 정월은 지금의 12월이다. 나라전체 행사로 여러 날에 걸쳐 하늘에 제사지내는 영고(맞이굿) 내내 음주가무를 즐긴다는 것이다. 또 평소에도 밤낮과 노소를 가리지 않고 길 다닐 때도 노래를 계속 불러 하루종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羣聚, 相就歌戲]…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其人絜淸自喜, 善藏釀]…10월에 지내는 제천(祭天)행사는 국중대회로 ‘동맹(東盟)’이라 한다.[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혈(隧穴)이라 부른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 수혈에 모신 국토신)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강]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좌석에 모신다.[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高句麗條)>

 

고구려의 동맹도, 부여의 영고처럼 음주가무가 행해진다. 평소에도 밤마다 촌락마다 떼지어 모여 노래와 유희를 즐긴다. 이와 같이 동이(東夷)가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중국 및 북방종족들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전통을 유지·발전시켰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 마을에서 굿판이 벌어지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춤판을 벌였다.

 

요즈음 두 달여 전인 6월 20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소니 픽처스 에니메이션 제작의 미국 에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가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영화 부문 1위에 오른 데 이어, 공개 4일 만에 41개국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구가하고, OST는 빌보드 차트를 비롯한 글로벌플랫폼을 장악하며 K팝 산업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등 글로벌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계 캐나다인 매기 강(Maggie Kang, 강민지)이 한국 문화에 영감을 받아 만들고자 구상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여러 명이 각본을 썼으며, 매기 강과 크리스 아펠한스(Chris Appelhans)가 감독을 맡았다. 줄거리는 K팝 걸그룹 헌트릭스(HUNTR/X)는 루미, 미라, 조이 등 3명의 멤버로 구성됐는데, 핍스타로서 공연도 하지만, 오랜 옛적부터 누대에 걸쳐 비밀리에 전승되어온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는 악령들을 퇴치하는 헌터로서 ‘혼문(Honmoon)’이라는 초자연적 장벽(악령 침투를 막는 일종의 결계)을 유지하는 사명이 있고. 노래를 통해 golden 혼문을 완성해야 한다. 그러나 중심인물인 루미[신영균 선배님의 외손녀 Ejae(김은재)가 노래함]는 반(半)악령 혈통을 가진 리더로, 갈등 속에 있고 약령 팝그룹인 사자 보이즈를 격퇴해야 한다.


강 감독은 5살 때 회사 일로 토론토에 간 아버지를 따라갔고, 1-2년만 체류할 줄 알았으나 5년 뒤 이민을 가게 됐다. 초등학생 때 여름방학은 모두 한국에서 보냈기에 한국 문화에 친숙하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친숙한 민화 호작도(虎鵲圖; 까치호랑이 그림)를 활용하고, 옛적에 제천의식에서 가무를 담당하고 신 또는 귀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한 영매였던 무녀들을 등장시키는 등 한민족 역사의 뿌리에 정통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떡볶이와 김밥 등 한국의 인기 음식을 비롯해 한복, 서울 풍경, 전통 무속 요소, 일월오봉도 등이 시각적으로 세련되게 녹아들어 있어 문화적 의미와 미적 완성도가 높다. 영어 가사 속에 적정한 정도의 한국어를 섞어 넣는 기법도 특기할 만하다.


40여 년 전 박물관 대학 때 선견지명을 보였던 강사분을 상기하며, 역사에 정통할 때 혜안이 생길 수 있음을 실감한다. 매기 강의 한국 감성과 정통한 역사의식에 바탕한 자신감과 실천력, 한국계 배역을 대거 기용한 용기를 찬양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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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광식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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