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 의사 선생님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아들이 사랑니 때문에 통증이 있어 치과에 갔는데, 사랑니가 그 앞의 어금니에 영향을 주어 상태가 좋지 않으니 그 어금니를 발치하고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은 겁이 나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고, 그 의사 선생님은 요즘 치과계에 덤핑 경쟁 이야기도 들리고 과잉진료에 대한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리니 선뜻 그 진단과 치료계획을 믿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내게 연락을 해와 의견을 물어왔다.
아들이 거주하는 곳이 부천이라 분당까지 오라고 하기에는 먼 거리라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진료해 오신 믿을 만한 선배님의 치과를 소개해 드렸다. 며칠 뒤 아버지가 결과를 알려주러 연락을 하셨다. 아들이 소개받은 치과에서 진료를 받고 왔는데, 앞의 어금니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맞지만 지금 당장 발치를 할 정도는 아니며 우선 신경치료를 해서 지내볼 수 있겠다고 설명을 들었다는 것이다. 치료 후 경과를 보다가 나중에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 발치를 고려해도 늦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선배님께 전화를 드려 이번 상황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졌다. 왜 어떤 치과에서는 치아를 살리려 하고, 또 어떤 치과에서는 비교적 쉽게 발치를 권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문제였다. 선배님께서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경치료를 하고 치아를 살리기 위해 여러 번 내원하며 치료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발치를 하고 임플란트를 하는 것이 진료 과정에서는 훨씬 단순하고 수월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논리라면 응급실에서 위중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그냥 숨을 거두게 하는 것이 더 쉬운 일 아닐까요? 우리가 치과의술을 행하는 치과의사인데 어떻게 쉬운 길만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은 말을 아끼셨다.
물론 다소 극단적인 비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치과의사의 역할이 단순히 치료 행위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환자의 자연치아를 최대한 보존하려는 방향으로 고민해보아야 한다면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께서는 또 하나의 현실적인 이야기도 덧붙이셨다. 요즘은 실손보험에 가입된 환자들이 많아 신경치료와 크라운 치료보다 비용을 더 크게 받을 수 있는 해당 치아의 발치 후 임플란트를 하는 치료계획을 오히려 환자쪽에서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다. 치료 기간도 더 짧고 결과도 비교적 예측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나는 다시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중환자실의 위중한 환자가 평소에 생명보험을 큰 금액으로 들어놓았다면, 환자나 가족이 연명치료보다 안락사를 원한다고 할 때 그것도 들어주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환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치과의사로서의 판단과 책임도 존재한다. 환자가 원한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이 최선의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만약 발치와 임플란트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치과의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면 자신의 진료를 비방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고민은 결국 생각이 통하는 몇몇 치과의사들과만 조심스럽게 나누게 된다.
선배님과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생각이 이어졌다. 우리는 모두 치과대학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며 치과의사의 길에 들어선다.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며 진료실에 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진료 철학을 갖게 되는 것일까.
물론 일상에서 환자를 대하는 진료는 교과서처럼 단순하지 않다. 환자의 여러 가지 처한 상황도 고려해드려야 하고, 의료진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신념도 중요하다. 임플란트는 현대 치과의학이 만들어낸 훌륭한 치료법이며 많은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조금 더 어려운 길로 가더라도 자연치아를 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요율적인 길을 선택할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전자의 길이 치과의사의 기본적인 자세라고 믿고 싶다.
문득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조동화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다시 떠올랐다.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비록 어느 치과에서는 치아를 쉽게 발치하고 임플란트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는 끝까지 치아 하나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치과의사가 한 명, 두 명 늘어난다면 치과계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치아 하나’가 아니다. 그 치아에는 환자의 삶의 시간과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진료실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치아를 정말 살릴 방법은 없는가? 조금 더 노력해 볼 여지는 없는가?”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치과의사로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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