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독후감

  • 등록 2026.05.20 18: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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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환자로부터 필자의 수필집 ‘꿈을 꾸는 수달이’를 읽은 감상문을 받았다. 날림 글씨라 해독하기 어려웠지만 몇 단어를 제외하고 앞뒤 맥락을 유추해서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자의 글을 쓴 공간적 배경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촌시골이었던 군위가 대구 신공항 건설계획으로 인해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곳이라 팔십 평생 고향을 지킨 할아버지와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았다. 지금 젊은 세대와 끼니 걱정하며 배고픔을 겪었던 우리 같은 낀 세대(대략 60~70세 사이)와 차이가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생각과 흡사하다며 너무 즐거워하셨다. 배움의 기회는 적었지만 두 아이를 키우며 평생 농사지으며 열심히 살아왔다며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

 

네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삐뚤삐뚤 써 내려간 글에서 할아버지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읽기가 혼란스럽고 집중하기 힘들어 다시 문서로 차근차근 옮겨 써보니 이해가 더 쉬웠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힘든 것보다 묘한 호기심과 즐거움이 함께 느껴졌다. 감상문을 읽으며 오히려 할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과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할아버지 말씀을 빌리자면, 필자의 책을 읽으면 어떤 장편소설이나 허풍 따위의 무협지, 어려운 베스트셀러나 중국 장풍소설, 일본 사무라이 소설보다 현실적이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책을 읽다가 잠이 오는 경우와 달리 읽을수록 정신이 더 선명해진다며 칭찬해 주셨다. 주관적 판단이겠지만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독자 한 분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책 속의 삽화그림 중 가을을 느끼게 하는 떡갈잎 가지는 직접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실물인 줄 알았다며 황룡사 벽화를 그려 날 짐승도 착각을 일으켰다는 솔거와 비유하셔서 과장된 표현이란 걸 알지만 기분은 정말 좋았다. 더러운 세상 덜 보려고 “나도 원이다.” 라고 외치며 절규하던 조선후기 천민 출신 화가 오원 장승업의 심정도 토로하셨다.

 

필자는 예전에 우주쓰레기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필자의 우주쓰레기 수거용 인공위성이나 그물망 대신 블랙홀 속으로 넣어버리는 상상도 하셨는데 현실성은 없어도 팔순의 촌로가 그런 상상하시는 것만으로도 서로 대화가 되어 기뻤다.

 

무엇보다도 장기기증과 사체기증까지 서약하셨다기에 대단하신 분이라 생각한다. 필자와 아내와 직원도 오래전 치과의사협회서 주관하는 한강변 ‘스마일 런 페스티발’에 참가하면서 장기기증 서약했는데 이런 계기로 주위 많은 분들이 장기기증운동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자란 표기도 되어 있는데 신분증을 제시할 일이 있을 때 한번 더 쳐다보기도 했다.

 

  여러 번 출간했지만 종이책 읽는 독자는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이다. 게다가 글씨를 쓰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비록 주위에 있는 분이라도 정성껏 읽어주는 독자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한번쯤 평소 좋아하는 글이 있으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사를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된다는 필자의 지도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책 읽고 독후감 쓰기 대회나 숙제가 있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바빠지고 삭막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손 글씨로 일기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정감을 누려봤으면 한다.

 


할아버지의 독후감

 

시골 할아버지의 책 읽기
읽을수록 달아나는 잠
펼쳐지는 호기심의 세계
내일은 무엇이 기다릴까

 

삽화의 떡갈잎
솔거의 황룡사 벽화
동일시한 할아버지 동심세계
함께하는 웃음폭탄

 

굳은살 두툼한 손
가슴으로 그린 비뚤비뚤 손 글씨
해독하며 미소 짓는다
미지를 향한 살아 숨 쉬는 꿈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광렬 이광렬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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