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퇴근길은 한 주일간의 쌓인 피로가 노곤함으로 몰려오는 시간이다. 진료하는 내내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신경은 어느새 느슨해진 활시위처럼 맥이 풀려 버린다. 할일 없이 열을 지어 이동하는 개미들처럼 도로 위 차량들의 정체는 지루하기 그지없다. 그 지루함과 나른함을 달래려 라디오의 볼륨을 높여 본다.
청취자 퀴즈문제로 ‘춘수모운(春樹暮雲)’이라는 사자성어의 뜻을 묻는 여자 아나운서의 상큼한 멘트가 들리고, 퀴즈문제의 힌트로 가수 안재욱씨의 노래 ‘친구’가 흘러나왔다.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던 너
늘 곁에 있으니 모르고 지냈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들
사랑이 날 떠날 땐 내 어깰 두드리며…’
춘수모운(春樹暮雲)이란 ‘봄날의 나무와 해질 무렵의 구름’이라는 뜻으로,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당(唐)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가 위북지역에서 봄철에 나무를 바라보다가 강북 지역에서 저문 날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동시대의 시인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며 쓴 ‘춘일억이백 (春日憶李白): 봄날 이백을 그리워하다’라는 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내게도 친구가 있다. 묵이와 승이는 나의 친구들이다. 우리 셋은 나란히 재수를 하고 대학에 입학해서 서로를 컨트리 스타일이라 부르며 친구가 되었다.
91학번으로 치과대학에 들어간 후 만나게 됐으니 햇수로 23년 지기이다. 묵이를 알고 지낸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으니 25년이나 되었다. 묵이에 대한 첫 기억은 수업시간에 앞에 나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My Way)를 멋지게 부르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묵이네 집에 처음 초대되어 놀러간 때의 일이다. 묵이가 유치원 앨범이라며 보여준 고급양장앨범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졸업한 시골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이 전부였다. 그나마 우리 반이 31명으로 학생 수가 가장 많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졸업장과 함께 졸업사진 한 장 달랑 받았을 뿐이다. 초등학교 앨범도 아닌 유치원 앨범이 있다는 게 당시 나로서는 상당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마치 처음 타보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떻게 타고 내릴까 걱정되어 앞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순간이나, 처음 택시를 탔을 때 내릴 때 문을 못 열면 어떻게 하나 싶어 당황했을 때처럼 말이다.
승이와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예과2학년 여름방학이 되고 방학 동안에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호남지역을 2주정도 둘러보는 여행일정이었다. 지도책을 펴고 당일 날 이동할 거리를 체크하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다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텐트를 설치하고 코펠에 밥을 해먹었다. 한여름 밤 하늘엔 구름사이로 바람과 별이 흐르고… 내 친구 승이가 함께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이 잔뜩 흐린 어느 날, 신호대기 중인 버스 옆에 자전거를 멈추고 나란히 서 있었다. 버스 안에서 웃고 떠드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비로소 익숙한 사람들과 낯익은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달궈진 아스팔트의 반사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햇빛에 그을린 살갗은 뱀의 허물처럼 벗겨져나갔다. 코뿔소처럼 도로를 무섭게 질주해오는 덤프트럭의 출현에 순간순간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2 주간의 자전거 여행 중 아마도 가장 힘든 시간은 지리산 정령치 고갯길을 자전거로 오르는 길이었다. 끝없이 이어질 거 같은 계곡과 산허리를 돌아 굽이굽이 고갯길을 땀을 흘리며 숨가쁘게 올랐다. 다시 더 가파른 고갯길에 접어들었을 땐 내가 자전거를 끌고 가는지, 아니면 자전거가 나를 끌고 가는지 모를 정도로 힘든 순간이 찾아왔다. 아득하니 내려다보이는 지리산 계곡들을 바라보며 다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은 마음에 어느 이름 모를 계곡 한 자락에 집이나 짓고 살고 싶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쯤에야 정령치는 우리에게 지리산의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며 정상을 허락해주었다.
재시를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악몽을 꾼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내일이 시험인데 시험범위까지 미처 공부를 끝내지 못했다든가, 연극공연 중에 무대 뒤에서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대사를 다 잊어버린 꿈을 꾸는 경우 말이다.
우리 세 명 모두 치주학 재시에 걸린 적이 있었다. 묵이네 아파트로 가서 ‘재시통과’를 외치며 라면을 끓여먹는 것으로 재시 준비를 시작했다. 재시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다음날 새벽 6시에 눈이 떠졌다. 친구들은 곤하게 잠들어 있고, 불안한 마음에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얼른 도서관이라도 가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전거를 타고 치대도서관에 갔다. 이른 아침이라 도서관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고 추운 날씨에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치대에서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센터 보호자 대기실이 생각났다.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응급실에 다급하게 실려 오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어수선한 틈바구니에서 공부하고 있으려니 내 신세가 한없이 처량하고 우울해졌다. 세 명 모두 치주학 재시는 무사히 통과하였으나 시험점수는 어찌된 영문인지 도토리 키재기였다.
누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하였는가?!
700원짜리 학생회관 식당 밥을 먹으면서도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어 즐거웠고, 중앙 도서관에서 철지난 메뚜기마냥 자리를 전전하다가 운 좋게 정착한 자리에서 엎드려 자다가도 자판기 커피 한 잔 하러 나가자며 피곤함을 잊게 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고마웠고, 지나보니 그 길고도 힘들었던 6년간의 대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어 감사했다.
개원초기에 직원일로 환자와의 일로 힘들어져서 누군가를 붙잡고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하소연하고 위로받고 싶을 때가 많았다.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 하는 내게 친구들은 같이 화내주고, 같이 안타까워해주고, 함께 공감해주었다. “정말? 세상에! 진짜 나쁘다… 맞어, 나도 너처럼 그랬어. 그때는 정말 힘들더라… 그럴 땐 이렇게 하면 좋은데…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있어. 힘내! 잘 될거야….”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새삼 마음에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어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내들에게 모처럼 쉴 수 있는 주말을 선물하자며 아이들만 데리고 아빠들끼리 캠핑을 떠났다. 화로대에 장작불을 피우고 아이들과 꼬치구이도 함께 준비하고 지글지글 삼겹살도 맛있게 먹었다. 잦아든 숯불에 감자와 고구마를 노릇노릇하게 굽는 동안 따분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아이패드를 열고 함께 ‘어거스트 러쉬(August Rush)’란 영화를 본다. 주인공 어거스트가 엄마 아빠를 만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의 얼굴도 환하게 밝아진다. 아이들의 잠자리를 봐주고 나면 모닥불 앞에서 세 남자의 소담스러운 수다가 시작된다.
승이가 올해 초 서울로 이사 오면서 셋 다 서울에 모여서 살게 되었다. 서울로 이사 왔으니 축하한다고 만나고, 인도네시아로 단기선교 떠나는 묵이 험한 길 잘 다녀오라고 만나고 , 선교마치고 잘 살아 돌아 왔으니 만나고, 승이의 생일이라 만나고, 자동차를 바꿨으니 시승식 해본다며 만나고, 집을 샀으니 집 장만 하느라 고생했다며 만났다. 그렇게 그냥 지나쳐도 될 일들을 꼭 만나야 될 일처럼….
저문 날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숫자 0과 1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숫자들이 있다고 한다.
잊고 싶은 기억들과 기억하고 싶은 기억들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기억들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올라 희미해지다 시나브로 망각의 강을 건너 사라져 버리기도 하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보낸 소중한 기억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올랐으면 좋겠다.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을 떠올려본다.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빠로서가 아닌 친구라는 이름표를 달고 함께 떠나는 여행을 말이다.
오늘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참 좋다.
임용철 선 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