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은인, 겨레의 스승 배설(베델) 선생

  • 등록 2015.05.19 11: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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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 제2028번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언론인, 영국 사람, 항일 독립투사 배설(裵設. 베델. Ernest Thomas Bethell)선생을 아십니까?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 갔단 말인가! (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乎)” 배설 선생의 서거를 안타까워한 고종 황제의 조문(弔文)입니다. 황제로부터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배설 선생은 “내가 대한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느님의 소명이다”라고 했습니다.

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민족의 자주와 독립,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생애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배설 선생은 우리정부가 선생의 항일 언론투쟁을 높이 평가하여 1968.3.1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하였고, 1988년 ‘뿌리 깊은 나무’가 선정한 ‘이 땅의 사람들’이란 제목의 근대인물 88명 중 유일한 외국인입니다.

이 책은 배설 선생에 대해서 “대한제국 말기에 어떤 한국사람 못지 않게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가 마침내 이 땅에서 돌아가신 언론인”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또한 ‘대한 언론인회’는 2004.3.24 ‘언론인 명예의 전당’제1차 헌정자 7분 중 첫 번째로 선정하였습니다.

일제의 침탈로 국권을 빼앗기고,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무참히 유린당했던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많은 독립투사 한 가운데 배설(1872.11.3 영국 Bristol 출생)선생이 우뚝 서 있습니다.

배설 선생은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The Daily Chronicle)의 특별 통신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1904.3.10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통신원으로서 최초의 송고는 1904.4.14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慶運宮)의 화재’를 취급한 특종기사였으며, 이 기사로 인해 배설 선생은 크로니클지의 특별 통신원에서 해고당했습니다. 배설(베델)선생의 해임이유 설명은 “크로니클지의 지시는 신문의 편집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한다. 당시 조선의 실정을 직접 보고 나니 신문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크로니클지는 나는 해고했다. 그 후 크로니클지는 나를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배설 선생은 해임 이후 민족진영의 독립운동가요, 사학가요, 언론인이신 우국지사 우강(雩岡)양기탁(梁起鐸), 백암(白巖)박은식(朴殷植),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선생 등과 접촉하면서 한 민족의 거국적인 민중운동과 애국지사들의 우국충정에 감화되어 대한매일신보(지금 서울신문)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를 창간(1904.7.18)해 명성황후 시해(1895년) 때부터 일제의 침략상과 온갖 만행을 낱낱이 폭로하는 항일언론 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영문판은 일본과 중국에서 발행되던 영자 신문의 기사를 상호 전재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상과 항일논설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펼친 배설 선생에게 고종황제는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裵設)이라는 한국이름과 신문발행에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라는 특허장(오늘의 특명, 임명장의 개념)’을 하사하셨고 배설 선생은 황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다는 소명을 갖고 더욱 항일 언론 투쟁에 정진했습니다.

배설 선생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편집 방향은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항해 항일언론투쟁과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에 필요한 기사만을 썼습니다.

주요 기사는 창간호 사설에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황무지 개간권 요구란 1904년 6월 6일 한국이 경작하고 있지 않는 모든 땅을 일제가 개간, 정리, 천식하도록 50년간 위임하고, 그 뒤 50년간 연장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위임한다면 전 국토의 2/3가 일제에 넘어가며 영구히 일제가 점령해 조선의 강토는 일제에게 강탈당하게 됩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 요구가 침략행위임을 지적하는 항일 논설과 온 백성들의 격렬한 반대를 연일 보도하였고, 고종 황제는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나라의 재정으로는 도저히 갚기 어려운 빚을 백성들이 성금으로 갚아서 일제의 강탈로부터 대한의 강토를 지키자고 하는 자발적인 모금운동 즉, 국채보상운동(1907.2 발기)이 일어났을 때는 대한매일신보가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가 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남자는 흡연을 전폐하고 한 달간 담배 값 20전씩을, 여자는 반지와 비녀까지 바쳤으며 고종황제도 이 때 담배를 끊었습니다.
또 대한매일신보사 간부 양기탁, 신채호, 옥관빈, 임치정과 같은 뜻을 가진 안창호 선생들이 비밀애국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했을 때 배설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사가 신민회 활동의 비밀 거점이 되도록 했습니다.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졌을 때 일제의 한국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궁중으로 군대를 끌고 가 총 칼로 고종황제를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고종황제는 이 조약에 옥쇄를 찍지 않았음)했고 하세가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후일 일본 총리가 됐습니다.

조약의 골자는 ‘한국의 외교 업무는 일본이 인수해 관장한다.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통감부를 한국에 상주시킨다’는 것으로 을사늑약의 강제집행으로 일제는 주한 일본 대사관을 영구 폐쇄하고, 서울에는 통감부, 지방에는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했으며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던 외국공관들은 모두 철수했습니다.

배설 선생은 을사늑약의 강제를 상세히 보도하고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논설과 애국지사들의 자결순국사건을 보도했습니다. 만일 대한매일신보의 보도가 없었다면 애국지사들의 자결순국사건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초대 사장 배설 선생을 비롯해 총무 양기탁, 주필 박은식, 주필 신채호, 주필 장도빈 선생들의 직필과 정론, 구국의 필봉으로 일제의 만행을 기탄없이 폭로하였지만 발행인이 영국이었으므로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등박문은 자신의 백마디 말보다 대한매일신보의 한 줄의 글이 더 무섭다고 몸서리 치며 통탄하였습니다. 생각 다 못해 일본공사 하야시는 주필 박은식 선생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에 배설(베델)선생은 “신문의 모든 책임은 발행인인 나에게 있으므로 박은식 선생을 즉시 석방하라”고 항의하여 일제는 치외법권상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설 선생은 자신이 펜을 들고 쓰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을 보호하고 뒷받침하며 용기를 복돋워 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신문사 정문에는 ‘개와 일본인은 출입금지’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또한 양기탁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매일신보사 2층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만세를 부르며 축하연을 벌였습니다.

특히 배설 선생이 하늘나라에 가서도 일제의 탄압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묘역에는 전국에서 보내온 성금으로 묘비를 세우고 장지연 선생이 지은 비문을 새겼으나 한국 병탄 후 일제는 비문을 깎아 버렸습니다. 광복 20년이 지난 뒤 1968년 한국 신문 편집인 협회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일제가 깎아버린 묘비 옆에 원래 비문 내용을 새겨 새 비를 세웠습니다.

대한매일신보가 자금난에 허덕일 때 사재를 털어 신문사 경비를 쓰게 하다 남편을 잃은 배설 선생 부인은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고종황제가 하사해 남편의 관을 덮었던 태극기, 신문사에 게양했던 영국기,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 사람들이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 제 책, 남편이 발행한 빛바랜 신문 뭉치만을 들고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부인은 ‘일제의 불의와 폭력에 의한 한국의 비극’을 보고 ‘모진 고난을 택한 남편’을 따라 서방언론(1910.10.9 영국 The South Bucks Standard)지에 선생의 항일 투쟁과 일제의 만행, 그리고 그들의 침략상을 폭로했습니다.

이처럼 배설 선생이 몸으로 보여준 조선 사랑의 영향으로 1919년 3월 전 민족이 참여한 기미 독립만세 운동이 있었고, 그 결과로 우리가 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조국 대한민국 이 땅 위에 있게 됐음을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치과의사들도 나 자신, 내 가족의 평안과 안위함만을 생각하기보다 내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더 밝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는 데 앞장서는 진실한 전문인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성화 구리보스톤치과의원 원장

정성화 구리보스톤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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