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읽다보면 장수(將帥)들의 키가 장난이 아니다. 칠 척은 축에도 끼지 못하고 8, 9척이 기본이다. 그런데 발 길이를 기준으로 한 서양의 피트(foot)보다 조금 긴 척은, 팔꿈치에서 손목까지의 길이로, 1800년 전 사람의 척골(尺骨; ulna)은 25cm 전후였다 한다. 거기에서 다시 ‘중국식 과장’을 빼도 현대의 잣대로 180에서 2m를 넘는 장신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거구를 태울 수 있는 준마(駿馬)를 타고 휘두르는 두 세배가 넘는 육중한 병장기에, 보통 병졸들은 추풍낙엽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부상 중인 투수 류현진이나 피츠버그 해적 강정호의 우람한 체격을 보면서, 프로선수들이 옛날에 태어났다면 장비나 여포 같은 맹장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이들이 근육질 덩치만 큰 게 아니고, 허리가 꼿꼿한 자세나 당당한 걸음걸이가 문자 그대로 보무당당(步武堂堂), 무리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는 완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어느 영화던가 승무원이 힘 좋은 승객을 급히 찾으며, “운동선수 없나요? 탁구나 배드민턴 빼고요.” 하던 대사가 있었다. “힘 빼는데 3년”이라는 골프역시 근육과는 크게 상관없어 보이지만, 소렌스탐이나 필 미켈슨이 근육운동으로 몸을 만든 뒤 전성기를 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금년에 한·미·일 3국 오픈에서만 5승의 신기록을 세운 전인지 프로를 비롯한 한국 낭자군(群)이, LPGA 상위권을 휩쓸면서 또 하나의 한류열풍이 불고 있다. 그 중에는 박인비·안선주 처럼 과체중도 있고 날씬한 최나연도 있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어깨를 펴고 허리가 꼿꼿한 자세다. 특히 전인지는 바른 자세에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이 런웨이의 톱모델을 뺨치게 우아하다. 스탠스 잡을 때부터 안정감·자신감이 TV 화면으로도 전해진다.
자세를 구부정하게 움츠린 챔피언은 드물다. 셜록 홈즈는 처음 본 노인의 쫙 편 어깨에서 퇴역 직업군인의 체취를 느낀다. 내과 개론(?)에서는 진찰실에 들어오는 환자 자세와 걸음걸이가 첫 번째 진단항목이라고 배웠다. 전신마취 수술 뒤에는 어깨를 펴고 폐 구석구석까지 공기를 최대한 들이마셨다가 힘차게 불어내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인간은 오랜 역사를 직립해서 살아온 동물이니까.
장비가 개선되어도 조금 굽은 등과 한쪽 어깨가 쳐진 자세는 여전히 치과의사 직업병이다. 앞에서 걸어가는 동료의 뒷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다. 신문보도를 보면, 미국 노동청의 자료 분석 결과, 건강에 가장 안 좋은 직업 27개 중에 치과의사가 1위라고 한다. 이유를 보면, 오염·감염원·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 쉽고,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길다”는 것이다. 여객기 Y 클래스의 장거리 탑승객이 갑작이 쓰러지는 원인이 심부정맥 혈전증(Deep Vein Thrombosis)으로 밝혀지자 좌석 간의 공간은 넓어졌다. 그러나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있으면, 역시 내장에 가해지는 압박과 하체 순환장애와 운동부족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진료에 열중하면 저절로 자세가 굽고 한쪽으로 쏠린다. 한 시간에 한 번쯤 나만의 주기를 만들어, 진료 중 쏠렸던 자세와 정반대 방향을 위주로 몇 분씩 맨손체조라도 하자.
가뜩이나 스트레스 많은 직업에 반갑기보다는 우울한 소식에 시달리는 현실이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자주 걷자. 전인지 프로처럼 얼굴을 들어 활짝 웃고, 자세를 가다듬어 자신 있게 발을 내딛자. 비록 힘든 시절을 지나고 있지만, 언필칭 사회 지도층 아닌가?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김장훈의 노래다.
임철중 임철중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