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도와 결과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좋은 결과’로 끝났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서로가 좋은 것입니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나쁜 결과’로 끝났다면, 의도한 문제가 발생하고 서로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나쁜 결과’로 끝났다면 또는 ‘나쁜 의도’를 가졌지만 ‘좋은 결과’로 끝났다면, 그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의도’는 알 수 없으니 ‘결과’를 봐야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악하거나 최소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질 수 있으니 어쨌든 ‘의도’를 봐야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착하거나 최소 너그럽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것은 경계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디까지인가?’, ‘어디까지가 나 인가?’ 경계의 문제입니다. 내 문제라면, 내가 당사자라면 ‘의도’가 중요합니다. 나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결과’를 보증할 수 없는 것이 사람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 문제가 아니라면, 상대방이 당사자라면 ‘결과’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보여준 실제 ‘결과’가 중요합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의도’는 알 수 없음)고 했습니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당사자라면 그의 ‘의도’를 참작해 줄 수 있습니다. 그 ‘의도’를 물어보아 알 수 있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의도’를 살펴봐 줄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이 당사자라면 ‘의도’를 참착해 주기 어렵습니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어 보아 대답을 들어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오직 ‘결과’만 중요하며 ‘의도’를 살펴보기엔 나란 사람과 그 사람과의 간극이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경계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디까지인가?’, ‘어디까지가 나인가?’ 경계의 문제입니다.
‘의도’는 알 수 없으니 ‘결과’를 봐야한다는 사람들은, 사악하거나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는 경계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나’라는 경계를 확장시켜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고립되기 전에 말이죠. 반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으니 어쨌든 ‘의도’를 봐야한다는 사람들은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기보다 ‘나’라는 경계가 불분명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기’라는 경계부터 분명히 직시해야 할 일입니다. 낭패를 보기 전에 말이죠.
그래서, 의도인가요? 결과인가요? 나는 어디까지인가요?
2) 정의
‘정의’란 무엇일까요? 누군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했지만, 저는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디까지인가’, ‘우리가 어디까지인가’의 문제, 경계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더군요. 또한 ‘보편적인 정의’가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기도 합니다. 경계는 사실상 모호한데다 확장되기도 축소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호, 불호도 마찬가지이구요. ‘나’는 ‘너’와 다르고 또 같지 않습니다. 같지 않으면 결국 나뉘더군요. 각자의 ‘정의’가 달라지고, 어느 것은 ‘선’이되고 다른 것은 ‘악’이 되는 것 같습니다.
큰 틀에서 같으니까 약간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비자발적으로 무시된다면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만, 그 차이를 자발적으로 무시한다면 또 성인군자가 됩니다. 사실 그런 합의가 어우러져 개인에서 조직으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의’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경계의 문제’는 곧 ‘수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의식의 수준이 높으면 확장된 경계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또는 경계를 갖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저는 잘 모르겠더군요. 오늘도, 늦은 밤까지 잠 못 들고 고전, 지혜의 말씀에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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