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계가 개원시장 중심의 치열한 경쟁으로 매몰된 현 상황에서 치의학의 빛나는 순간들을 짚어봄으로써 오늘날의 치과의사들이 사용하는 술식의 원류를 되짚고, 이를 통해 치과의사로서의 뿌리를 재확인하고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합니다.
치의학을 빛낸 선학들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 치과인들의 현주소와 긍지를 생각해 봅니다.
19세기 중반 전신마취발견에 앞장선 5인의 치과의사들의 활동과 그들의 역할을 돌이켜 보겠습니다.
엘리야 포프 Elijah Pope(1818-1856)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출신으로 의과대학 학생이던 엘리야 포프(Elijah Pope)는 1842년 1월, 동료인 윌리엄 E. 클라크(William E. Clarke, 1819-1898)의 권유로 에테르(ether)를 사용, 한 여성의 무통발치 시술을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도교수였던 엘리엇 모트 무어(Elliott Mott Moore, 1814-1902)는 이 현상을 보고받고 마취 효과로 인정하지 않았고 여성의 무통반응을 단순히 ‘히스테리성 반응’으로 해석하며, 에테르의 부작용을 중요시 하며, 실험의 의학적 의미를 간과했습니다. 결국 포프와 클라크는 자신들의 시도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지 못한 채, 무통발치 사실을 의무기록에 간단히 남기는 데 그쳤고. 별도의 발표나 연구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포프는 이후 1843년 버몬트 의과대학(Vermont Medical College)을 졸업해 의사 자격을 취득했으나, 1844년부터는 치과의사로 활동했으며, “Pope, E. & Co., Surgical Instrument Makers”라는 이름으로 외과 기구 제작에도 관여했으며, 1845-1846년에는 “Pope, E. & J. C. Hobbey, Dentists”라는 공동 치과 진료소를 운영하다가 불과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동안 잊혔으나, 1881년 러시 의과대학(Rush Medical College)의 헨리 M. 라이먼(Henry M. Lyman1835-1904) 교수가 당시 기록을 재조명하면서 알려졌습니다. 영원히 잊힐 뻔한 마취학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한 의학자의 노력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호레이스 웰스 Horace Wells(1815-1848)
출생과 치과의사의 길
1815년 1월 21일, 미국 버몬트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난 호레이스 웰스(Horace Wells)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며 정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정규 치과대학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는 1834년부터 약 2년간 보스턴에서 도제식 치과 수련(apprenticeship dentistry)을 거치며 개인 연구를 통해 치과의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스승은 훗날 하버드 치과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는 네이선 쿨리 킵(Nathan Cooley Keep)이었습니다.
1836년, 웰스는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 치과를 개업하며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대규모 치과 진료소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그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후 미국 치의학과 마취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윌리엄 T. G. 모턴(William Morton), 치주과학의 시작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는 존 리그스(John Riggs), 그리고 훗날 필라델피아 치과대학(Philadelphia Dental College)의 공동 설립자가 되는 C. A. 킹스버리(C. A. Kingsbury)였습니다.
웰스는 발치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무통 발치에 대한 그의 집념은 훗날 아산화질소(N₂O, 웃음가스)를 이용한 마취 실험으로 이어지며, 인류가 ‘통증 없는 수술’ 시대를 열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1838년, 웰스는 『An Essay on Teeth, Compri sing a Brief Description of Their Formation, Disease, and Proper Treatment』을 출판하였고, 이 저서는 치아의 발달 과정과 질환, 적절한 치료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칫솔 사용과 구강 위생을 강조한 예방치과학의 중요성을 일찍이 강조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환자진료로 평가되며, 치의학의 학문적 기틀을 마련한 업적이었습니다.
무통발치 아이디어. 웃음가스, 그러나 좌절로 끝난 첫 시연
1844년 12월 10일, 화학자 가드너 퀸시 콜턴(Gardner Q. Colton, 1814-1898)이 서커스 공연에서 한 청년이 아산화질소(N₂O)를 사용해 공연하던 중 다리를 심하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치과의사 호레이스 웰스(Horace Wells)는 번뜩이는 영감을 받았고, 아산화질소가 무통발치의 해결책이 될 수 있겠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이튿날인 1844년 12월 11일, 웰스는 콜턴에게 아산화질소로 자신을 마취할 것을 부탁하고, 제자 존 리그스(John Riggs)에게 자신의 치아를 발치 하도록 했습니다. 웰스는 완전한 무통 상태에서 발치를 경험했고 이후 그는 12명의 환자에게 동일한 방법을 적용해 성공적인 무통발치를 이어갔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웰스는 1845년 1월,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에서 일반인과 의과대학생들 앞에 공개 시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시술 도중 환자가 공포에 휩싸여 울부짖으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현장은 혼란에 빠졌고, 공개 시연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사기꾼으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웰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는 치과 개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진료권리와 실무를 존 리그스에게 모두 넘긴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떠돌며 유랑 생활을 이어갔으나, 그의 삶은 점차 비극으로 기울어졌습니다.
호레이스 웰스의 최후와 재평가
호레이스 웰스(Horace Wells)는 이후에도 마취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자신의 공적을 인정받기 위해 파리 의학회(Parisian Medical Society)에 업적인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실의에 빠진 그는 방황하는 생활을 이어가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죽음 불과 12일 전, 파리 의학회는 마침내 웰스의 업적을 인정했으나, 이를 모른 채 1848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고통 없이 외과적 수술을 수행하는 방법을 최초로 발견하고 실천한 인물로 평가되고, 치과 및 외과 전신마취의 진정한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업적은 사후에 인정받았습니다.
·1864년: 미국 치과의사협회(American Dental Association)가 웰스를 현대 마취의 발견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1870년: 미국 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가 그의 업적을 인정하고, 웰스를 명예회원으로 선출하며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종관 교수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명예교수
·대한치주과학회 고문
·전 연세치과대학 병원장
·2010 치협 학술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