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요. 그렇다고 이대로 다 같이 죽을 순 없잖아요.”
같은 건물 4층과 6층에 각각 치과를 운영하는 A 원장과 B 원장은 이 말 한마디를 꺼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지난 4월, 서울 시내 한 식당에서 같은 건물 혹은 바로 옆 건물에 자리한 치과 원장 4명과 치과 상담 실장 1명, 마케팅 전문가 1명이 조용히 한자리에 모였다. 어떤 기관의 주선도 없었으며 공식 단체의 후원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경쟁하다가는 다 죽겠다”는 공통된 위기의식이 이들을 한 테이블로 불러 모았다.
실제로 최근 수년간 개원가는 극심한 ‘치킨게임’에 내몰리고 있다. 임플란트 할인을 외치는 현수막이 치과 외벽을 뒤덮고, SNS와 포털 광고에는 ‘최저가 보장’이라는 문구가 넘쳐난다. 치과끼리 수가를 두고 경쟁하는 양상이 수년째 이어지면서 개원의들 사이에서는 “진료보다 마케팅이 더 힘들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다.
이 같은 극한 경쟁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건보공단이 운영 중인 ‘비급여 정보 포털’에서 ‘치과 임플란트(1치당)-Zirconia’ 가격을 확인해보면 전국 최저 가격이 7만9000원으로 나와 있을 정도다. 이는 가격 경쟁이 극심해 수가 체계가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수치다.
또 본지가 올해 2월 기준 지방행정인허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본지 3105호)에 따르면, 전국 각 치과는 반경 1km 안에 경쟁 치과가 평균 27.18곳이나 분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의과(15.17곳)의 1.79배, 한의과(20.25곳)의 1.34배에 달하는 수치다.
# “우리부터 가격 표시 광고 하지 말자”
이날 모임을 처음 제안한 개원 10년 차 A 원장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반경 1km 안에 치과가 다섯 곳이나 더 생겼다”며 “가뜩이나 주변에 치과가 포화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새로 생겨난 치과에서 수가를 내리기 시작하니 환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게 체감됐다. 그래서 덩달아 할인 이벤트를 열고, 광고비 늘리고. 그게 1~2년 반복되니 지출은 점점 불어나고 피로만 쌓이더라. 그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고 전했다.
B 원장도 “환자 한 명 유치하는데 드는 광고비가 몇 년 전에 비해 몇 배는 오른 것 같다. 근데 정작 치료비는 그 반대로 가고 있으니까 죽을 맛이다. 이런 문제를 제도로 바로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장 죽고 사는 문제가 코앞인데 나라도 주변 치과를 설득해야겠다 싶어 나왔다”고 말했다.
이들이 이날 테이블에 올린 화두는 ‘어떻게 하면 서로 상생할 수 있을까’였다. 격한 감정이나 고성은 없었다. 오히려 담담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구체적인 상생안들을 하나씩 제시할 뿐이었다.
첫 번째로 거론된 것은 온·오프라인 광고에서 임플란트를 포함한 시술 가격을 빼자는 제안이었다.
이와 관련 A 원장은 “가격 광고가 시발점이다. 거기서부터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A 원장에 따르면 실제로 환자들이 임플란트 가격이 적힌 타 치과의 광고를 내보이며 진료비를 흥정하는 일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에 다른 원장들 역시 해당 안을 수용해 가격표시 광고를 자체적으로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 개원가 자정 등 실질적 변화 기대
두 번째는 협진 체계 구축이었다. 개원 5년 미만인 C 원장은 “사실 모든 진료를 다 잘할 순 없다. 내가 잘 못하는 걸 억지로 하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환자도 불행하고 나도 힘들다”며 “이럴 때 선배 개원의들의 도움을 받고 싶을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이와 더불어 치료 도중 환자 전원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환자의 치료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협력하자는 의견도 제시, 힘을 모으기로 했다.
세 번째로 지나친 덤핑과 과잉 진료, 불법 의료 광고를 일삼는 문제 치과에 대한 동반 대응을 약속하기도 했다.
D 원장은 “문제 치과에 항의하고자 할 때도 개인이 하다 보면 먹히지 않는다. 지역 지부나 치협을 통한 문제 제기도 있지만, 주변 치과에서 함께 대응한다면 그 효과가 개인보다는 더 크지 않을까 싶다. 같이 움직여야 뭔가 바뀐다”고 의견을 냈다. 이에 모두가 공감, 지속적인 자체 모니터링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번 원탁회의는 온라인 상이 아닌 지역 개원가에서 자발적으로 태동한 모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특히 경쟁에 내몰려 덩달아 저수가 이벤트를 준비하거나 가격 표시 광고를 진행하려던 치과들이 마음을 다잡고 직접 참여한 모임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변화의 초석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또 해당 소식을 접하고 주변 문제 치과와의 만남을 추진하거나 인근 치과와 모임을 더욱 활발히 하는 치과도 생겨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를 주선한 A 원장은 “언제까지 싸우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치협에서 과도한 경쟁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걸 알고 있다. 치협은 치협대로 일하고, 개원가는 개원가대로 자정 노력을 기울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보면 느리지만,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지 않을까. 치대 동창들도 좋고 주변 원장들끼리의 만남도 좋고 이런 모임이 지역 곳곳에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