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5 (월)

  • 구름많음동두천 18.7℃
  • 맑음강릉 19.7℃
  • 구름많음서울 21.3℃
  • 흐림대전 18.9℃
  • 맑음대구 21.1℃
  • 맑음울산 20.1℃
  • 구름많음광주 21.8℃
  • 맑음부산 21.6℃
  • 구름많음고창 19.2℃
  • 제주 22.3℃
  • 맑음강화 19.6℃
  • 구름많음보은 17.1℃
  • 구름많음금산 19.4℃
  • 구름많음강진군 19.5℃
  • 맑음경주시 18.9℃
  • 맑음거제 19.2℃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나치 시대의 구강악안면외과 의사들, 그리고 선택

시론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는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1945년 4월 석방될 때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1938년 3월 나치 체제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할 당시, 비엔나 인구의 8%만이 유대인이었으나 비엔나의 개원의와 전문직 의사 가운데 유대인의 비율이 2/3 이상을 차지하였다. 의사는 유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문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치 정부는 오스트리아 점령 3일 만에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던 비엔나 의대 교수 197명 중 153명을 전격적으로 해고하였다. 유대인 및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들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을 들어 학교에서 쫓아낸 바람에, 유대인 의사들은 국외로 망명하거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거나, 자살하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치의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갖은 고생 끝에 Gottlieb(구강병리)는 Michigan 대학, Sicher(구강해부)는 Loyola 대학, Orban(구강병리)은 Northwestern 대학으로 도피하였다. 미국 치의학계가 2차 대전 후에 세계 수준이 된 것은 망명한 유대인 학자들의 덕이 컸다.

 

하지만 프랭클의 경우, 차마 부모만 남겨두고 미국으로 탈출하지 못하였다. 비엔나 로스차일드 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일하다가 유대인이었던 아내와 1941년 결혼하게 되었다. 나치의 우생학 정책은 그들을 “부적합한 결합”으로 규정하여, 결국 임신한 아기를 포기하였다. 1942년, 그의 가족들이 각기 다른 수용소로 끌려갔고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아내가 수용소의 혹독한 환경에서 병으로 죽거나 가스 처형실에서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자 그는 기적적으로 수용소에서 생환하여 앞서 말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책을 쓰게 된다. 1년 후인 1946년, 그는 비엔나 대학병원에서 회진을 돌다가 남은 생을 함께 할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녀는 비엔나 대학병원 구강악안면외과 병동의 간호사였다.

 

나치 정권하의 비엔나 대학병원 구강악안면외과는 어땠을까? 당시 Hans Pichler라는 전설적인 교수가 과를 이끌고 있었다. 매우 성실하고 신중한 성격의 그는 프로이트가 1923년 구강암으로 진단받은 후 1938년 5월에 런던으로 망명할 때까지 16년간 헌신적으로 치료해 주었다. 자신의 후임이 된 Ullik을 위시하여 근대 악교정 수술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긴 Trauner, Kole, Wunderer 등을 지도하며 비엔나를 유럽 구강악안면외과의 최고봉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구강악안면외과 교과서의 악교정 수술 술식 상당수는 그들의 이름과 업적으로 채워져 있다. 오스트리아 구강악안면외과 학회에서 매년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학술상 이름도 “Hans Pichler Prize”이다.

 

그러면 히틀러의 나치 정권 당시 독일 상황은 어떠했을까? 비엔나와 대비하여 악교정 수술 분야를 보자면 베를린 대학병원의 Axhausen (1877-1960) 교수 아래 독일 구강악안면외과학회를 창설한 Waßmund(1892-1956)와 그의 제자 Schucardt(1901-1985) 등이 포진하여 독일 구강악안면외과의 독보적인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2021년 유럽 구강악안면외과학회지에 충격적인 논문이 발표되었다(Bitterich & Gross, 2021). 나치 정권 하에서 구강악안면외과의사들과 나치당의 관련성에 대한 논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만든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SDAP, 나치당)에 가입한 구강악안면외과 의사·교수들의 명단이 공개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빛나는 업적을 남긴 Pichler, Ullik, Hofer, Waßmund, Obwegeser의 이름이 나치당원으로 올라와 있다. 이중 Obwegeser는 1938-1945까지 인스브룩 의대생이었고, 적극 가담자로 볼 수 없어 지금까지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Pichler 교수의 경우, 자신이 그토록 애써서 보살피던 유대인 교수 프로이트가 영국을 떠난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던 바로 그해에 나치당원으로 입당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나치 정권과의 연루 이력 때문에 종전 직후 1945년 교수직과 병원 직위에서 물러났고,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9년 사망하였다.

 

1933년 나치 독일에서는 “유전 질환 자녀 출산 방지법”이 제정되어 정신병이나 선천성 기형 등이 있을 경우 강제 불임 시술을 받게 하였다. 이는 유전적으로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을 제거하여 전염을 막고, 나치당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유전자를 번성하게 한다는 우생학적 신념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로 인하여 36만 명 이상이 강제 불임 시술을 당하였다. 1935년에 혼인 건강법이 제정되어 유전적으로 “건강한” 사람과 “부적합한” 사람 간의 결합을 금지하였다.

 

이 시기에 베를린 대학의 Waßmund 교수는 “구순구개열을 근절시키는 것이 이환된 가족과 국가 전체에게 축복이다”라며 강제 불임 수술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에 반해 그의 스승 Axhausen은 이러한 강경한 우생학적인 입장과 반대 입장을 보였다. 제자 Schucardt는 핍박을 이기지 못하여 유대인 아내와 이혼하여 딸과 함께 미국으로 도피시키고 나치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가, 전후에 함부르크 대학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2011년 독일 구강악안면외과학회에서는 Waßmund의 나치당 관련 문제를 공론화하여 “Martin Waßmund Prize”를 “Science Prize”로 이름을 바꾸고 공식 사과하였다.

 

위의 Bitterich & Gross (2021) 논문에서 구강외과 의사들의 나치당 가입 비율(62%)이 일반 의사(45%)보다 높은 것은 나치 정권이 전쟁 중에 이 분야의 사회정치적인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였고, 의사들이 나치 하에서 승진하고 경력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고자 하였으며, 히틀러의 “인종의 순수성” 개념에 동조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나치 정권은 시체뿐만 아니라 생체의 금니를 뽑아서 추출한 금을 중요 자원으로 관리하였는데, 수용소에 배치된 치과의사들이 이러한 발치 업무에 관여하였다.

 

많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의대 해부학 교실에서 수용소 가스 처형실이나 감옥에서 죽은 희생자의 사체를 바로 옮겨서 해부나 조직학 실습에 사용하였고 그 시신의 수가 3200구 이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비엔나 의대에서는 심지어 그것을 해부 아틀라스로 출판하였다(Pringle 2010). 그 이외 많은 의사들과 의대 교수들이 나치당에 가입하거나 깊숙이 협력하여 대량학살 정책을 정당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주어진 환경을 불평하지 않고, 최대한 자신을 맞추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었음을 체험하여 온 모범생들일수록 집단의 의견에 개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더군다나 그러한 저항의 결과가 본인에게 직접적인 위험으로 이어질 것을 예상하면 체제에 순응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집단의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면, 프랭클 같은 사람들을 수용소로 내몰게 되며 나치당에 가입한 많은 구강외과 교수들처럼 체제 안에서 성공과 출세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나치즘에 동조하고, 동료들의 비극을 외면한 교수들이 전쟁 후에 나치 협력자 혹은 친나치 의사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인간화된 전문가이든 기회주의적 지식인이든 언젠가는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어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