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이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학교에서의 교권 회복에 관한 내용인데, 드라마적인 요소로 가상의 정부 기관인 교권보호국에서 파견한 인물이 통제불능의 학생들을 소위 ‘참교육’하는 과정을 그렸다. 논란 속에서도 많은 시청자들이 이 내용에 통쾌해 하였고, 일부 현직 교사들의 격한 공감이 있었다.
그런데 전근대적 분위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필자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이상하기만 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그려진 70년대 말 학교 풍경은 폭력이 난무하고, 학생들이 일방적인 피해자로 억울함을 겪는다. 드라마에서 교권 보호국의 역할을 일선 교사들이 폭력을 불사하며 감당하였고 이런 분위기는 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이에 반해 학생인권 조례 등의 조치를 필두로 학생 인권을 강화하는 사회적인 변혁이 일어난 것이 2010년대 초반이다. 그리고 청탁금지법인 김영란법이 2016년에 발효되었다. 그 결과 요즘 학생들은 소풍과 운동회가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 불과 10년만에 학생 및 학부모가 교사의 생사이탈을 결정하는 사회가 되었다. 최근까지 피해자였던 학생들을 이제는 타도해야 할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간다. 이러한 변화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생소하다. 물론 10년이면 강산이 변할 세월이라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80년대 말 학창시절을 보낸 필자는 소위 문제학생들이 당시의 삼엄함 속에서도 얼마나 영악하게 교사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는지 목도하면서 자랐다.
드라마에서처럼 폭력을 다시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면 과거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도입할 때 급진적 변화가 악용될 가능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은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나 학생은 항상 옳고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는 매우 위험하다. 학생인권 조례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교사의 체벌이 어떤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가에 대한 논의는 제쳐놓고 ‘체벌’은 안 된다는 대명제만을 관철하였다. 이제 교사들이 학생을 통제할 경우는 체벌금지 조항에 위배, 그대로 놔둘 경우는 방임에 해당하는 소위 ‘외통수’에 몰리고, 과거에 학생들이 겪었던 것처럼 이제는 교사들을 사지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어느 정도의 체벌을 허용해야 할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러한 변혁의 파도속에 우리는 교사와 학생간 절대로 중요한 ‘신뢰’라는 가치를 잃고 있다. 교육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학창시절에 의사는 소위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하여 환자와의 관계에 있어 우위를 점하였다. 대학 시절에 의료법에 관해 배우면서 의료인이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행해진 의료 행위에 대해 다소의 악결과가 발생하더라도, 아마도 인체의 다양한 반응 때문에 의료인을 보호하는 차원의 판결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배웠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각종 법안들이 입안되었고, 이제는 과정이 적절하였더라도 악결과 혹은 애매한 분쟁상황이 발생시 의료인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판례가 잇따르고 있다.
의정사태를 겪으면서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가장 최근에는 의료인의 의료사고 이력을 공개하자는 법안이 발의되는 실정이다. 의료인들도 교사들과 비슷한 수세에 몰리고 있다. 치료를 하여 악결과가 나오면 책임을 져야 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진료거부에 해당하는 외통수에 몰려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려되는 것은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가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자간 분명히 가해자와 피해자를 정의하면 갈등이 해결된다고 보는 것인가?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 입안자들은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의 법안 혹은 규정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취사선택을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컨센서스는 없는 듯하다.
모든 환자가 선하거나 악하지 않고, 모든 의료인이 반드시 선하거나 악하지 않을 것이므로, 인간의 존엄성이 의료인과 환자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특정 규정이 서로간의 신뢰를 해하는가를 염두에 두어 최선의 법안을 취사선택해야 한다고 본다. 때에 따라서 특정 군을 잠재적 가해자로, 반대편을 피해자로 먼저 규정하고 정책을 추진한다면 결과는 긍정적일 수 없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wag the dog)란 말은 주객전도의 의미로 쓰이는 서양 속담이다. 때로는 꼬리가 중요하게 보이기도, 몸통이 중요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꼬리만, 혹은 몸통만 존재하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꼬리가 꼬리의 역할을 더 잘 할 수 있게, 몸통이 몸통의 역할을 더 잘할 수 있게 하려면 고민 속에 만들어진 많은 정책적 묘안이 정작 실현되지 못하고 혹 사장되더라도, 국민을 위해 더욱 선택적으로 신중한 안을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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