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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맛 3:풍미당(豊味堂) 우동

임철중 칼럼

남북전쟁 전후 명중률과 관통력이 높은 라이플(Rifle: 강선 총)이 나오고 자동화기(Machine gun)까지 보급 되자, 보병들은 참호(Trench)를 판다. 참호 진을 돌파하려면 공격에 앞서 대포의 일제사격(Salvo)이 필요한데 적진의 초토화는 사실상 어렵고, 사격의 주목적은 땅에 묻은 전화선을 잘라 통신을 차단함으로써, 단위부대로서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데에 있었다.

 

일차대전 때 시작된 전투방식은 6·25 남침에도 답습되는데, 까맣게 피복한 전화선을 삐삐선이라고 불렀다. 잘려진 낡은 선, 유출된 새 선 할 것 없이 삐삐선이 지천으로 널렸는데, 손재주 뛰어난 우리 국민이 이것을 그냥 버릴 리 없다. 예쁘게 엮어 가볍고 튼튼한 바구니는, ‘가구’라는 이름으로 주부들 장바구니로 많이 팔렸다.

 

주말이면 장보러 나서는 어머님 뒤를 나는 가구를 들고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10남매에 치과직원까지 식구가 스물에 가까우니까 손이 큰 손님으로 인기가 많아, 여기저기 들르다보면 두어 시간이 금방 간다. 마지막 목적지는 지금은 없어진 원동 초등학교 앞 ‘풍미당’ 빵집. 주 메뉴는 도우넛이지만 입 짧은 어머님은 두 번째 메뉴인 가께우동을 즐기셨다. 점점 무거워지는 가구를 들고 힘겹게 따라다닌 필자가, 드디어 보상을 받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검사를 받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다.”가 바로 ‘노인 헌장’이란다.
외래 진료와 검사가 많아 가끔 대학병원에서 점심을 먹는다. 지하식당 ‘사누끼 우동’은, 아부라기(유부)가 강냉이처럼 둥둥 뜨고, 가마보꼬(겉은 핑크 빛에 속살은 뽀얀 원 어묵)도 몇 쪽 들어가 먹음직스러운 데, 그 옛날 풍미당 우동 맛에는 택도 없다. 하필 농번기에 쳐들어온 김일성 덕분에, 먹거리도 몸에 걸칠 옷도 태부족인 전란의 폐허에, 밀가루와 메리야스만은 넉넉했던 까닭은? 미국과 상호안전보장법(1951)에 의해 ‘잉여농산물 무상 공급’이라는 단비가 내린 덕분이다. 곧 미 공법 480호로 단일화 되고, 1963년에 장기차관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전폭적인 원조가 없었더라면, 민간인 사망자는 백만이 아니라 그 두어 배가 넘었으리라.

 

삼남의 교통중심지인 대전은 밀가루와 원면을 분배하는 물류센터가 되었고, 칼국수 집과 가내수공업인 메리야스공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아낙네 손맛으로 씨 간장에 멸치 다시, 유부는 길쭉길쭉 파는 송송 썰어 넣고 화룡점정, 맵싸한 고춧가루를 한 찻 술 풀면, 따끈한 우동국물은 말 그대로 감로수로다. 일본산 우동이 출출한 여행객 뱃속을 달래주던 가락국수로 진화하고, 도우넛은 대전 명물 찹쌀 도우넛과 성심당 튀소(튀김 소보로)로 업그레이드 된다. 대전역을 나와 대한통운 횡단보도를 건너면 자투리땅에 지은 두세 평짜리 ‘대전역 가락국수집’이 옛 맛을 지키고 있다.

 

지난 6월 서울 롯데타워에서 50년 만에 열린 와인 블라인드테스트 결과, 또다시 프랑스가 미국와인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나파벨리의 강렬한 태양과 드넓은 모래밭과 콜로라도 맑은 물이 빚어낸 천혜의 예술이다. 기꼬망 아부라기 가마보꼬에 가츠오부시, 게다가 시찌미까지 갖은 향신료로 꾸며 봐도, 사누끼우동 맛이 풍미당 가께우동에 족탈불급(足脫不及)인 까닭은, 땅과 기후로는 설명 되지 않는다. 시쳇말로 가리지널(?)이 오리지널을 뺨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은, 박토에서 나는 200여 종 초목을 뜯어 나물을 무쳐먹던, 가난한 우리 아낙네의 가냘픈 손맛이 일등 공신이다.


밍밍한 사누끼우동이 한국에 와서 맛갈찬 냄비우동으로 진화한 것은, 일찍이 황우석박사 세포핵 치환 술로 증명된 손재주에, ‘은근과 끈기’가 더해져 일궈낸 토착화(土着化: settle)인 것이다. K-푸드가 뜨고 있다. 미군부대 잔반(殘飯)에서 건진 햄, 소시지, 베이컨에 쌀을 넣어 푹 끓인 꿀꿀이죽은, 단돈 5원에 굶주린 지게꾼들의 뱃속을 따스하게 덥혀주었다. 남산 구름다리 밑 박 외과 옆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두 개 걸린 식당이 6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다. 진화를 거듭한 꿀꿀이죽은 오늘날 세계 젊은이가 즐겨 찾는 부대찌개가 되고, 작장면(炸醬麵)은 짜장면으로, 프라이드 치킨은 튀김과 양념으로 나뉘더니 불닭으로 토착화 된다. 라맨은 라면으로 이름이 바뀌고, 모리소바를 기껏 쯔유에 찍어먹던 국수의 나라 일본인들이, 동치미 국물에 말아낸 냉면을 맛보고는 기함을 한다. 어찌 음식뿐이랴. 팝과 클래식 문학, 자동차, 선박, 무기 등 제조업에 이어, 이미 토착화하여 선두에 올라선 K-의료가 뜨고 있다.


은근과 끈기가 신뢰와 팬덤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에, 치과계도 앞장 설 길을 찾아 동행하자.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