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동기·선후배들과 투자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재미있는 장면을 자주 만납니다. 하루 종일 임플란트를 심고 구강스캐너를 쓰고 CBCT를 들여다보던 사람이, 투자 이야기가 시작되면 갑자기 요즘 반도체와 인공지능 투자의 단골 키워드인 HBM과 GPU를 이야기합니다. 반도체 공정은 잘 몰라도 어느 회사의 실적은 좋아질 것 같고, 인공지능의 원리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워도 어느 AI 회사의 주가는 더 오를 것 같다고 합니다.
물론 남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초기 기술기업에 투자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저조차도 투자계좌를 열면 제가 가장 잘 아는 분야보다 요즘 시장에서 잘나간다는 종목에 먼저 눈이 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무엇을 잘 아는가’보다 ‘요즘 무엇이 오르는가’를 먼저 보는 데 익숙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치과의사들을 대상으로 투자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된 진료를 마치고 모인 분들이 얼마나 집중할까 싶었는데, 강의가 끝난 뒤에도 질문이 오래 이어졌습니다. 주식과 부동산은 물론 비상장기업과 벤처투자까지 관심의 폭도 넓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반대의 질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치과의사는 왜 정작 치과기업에는 잘 투자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치과의료기기 산업만 놓고 봐도 2024년 국내 생산실적이 4조 원을 넘습니다. 전체 의료기기 생산의 36%에 달하고, 수출도 14억 달러에 육박합니다. 임플란트 관련 제품만으로도 연간 생산액이 3조 원을 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산업의 최전선에서 치과의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합니다. 임플란트부터 각종 재료와 기구, 구강스캐너와 CAD/CAM, 소프트웨어까지 수많은 제품을 직접 고르고 사용합니다.
새 제품을 소개받을 때면 그 경험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참 설명을 듣다가 “그래서 이걸 진료실에서 언제 쓰죠?”라는 질문 하나로 약점을 찌르기도 하고, 별것 없어 보이는 기능을 보고 “이거 제대로 되면 당장 사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품의 화려한 스펙보다 실제 진료 흐름 속에서 쓸 수 있는지를 먼저 보는, 말하자면 치과산업의 베테랑 사용자들입니다.
저도 치과 스타트업 투자를 검토하다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시장 규모와 경쟁사, 매출을 비교하며 한참 사업계획서를 들여다본 뒤 제품을 현직 치과의사에게 보여주었더니, 몇 분 만져보고 우리가 놓친 문제를 툭 던졌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시스트가 싫어할 텐데요.” 별것 아닌 한마디 같지만 진료실에서는 치명적입니다. 원장이 아무리 좋아해도 매일 써야 하는 직원들이 번거로워하면 그 제품은 결국 서랍이나 창고로 들어갑니다.
반대로 투자자의 눈에는 기술이 화려하지 않은데 임상가들이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제품도 있습니다. 매일 반복하면서도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작은 불편을 정확히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투자업계에서는 이런 것을 ‘산업 전문성’이라고 부릅니다. 치과의사에게는 그저 평범한 하루의 진료입니다. 수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환자를 보면서 어떤 제품이 진료실에서 살아남는지, 환자와 직원이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원장들이 어디에 돈을 쓰는지를 몸으로 배웁니다. 재무제표나 기업설명 자료에는 잘 적히지 않는 정보입니다.
물론 현장을 잘 안다고 좋은 투자까지 곧바로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불편하다고 시장 전체가 불편한 것도 아니고, 내가 사고 싶다고 충분한 고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품이 좋아도 시장이 작을 수 있고, 잘 만드는 것과 잘 파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과 자금, 유통과 사업모델, 회수 가능성도 냉정하게 따져야 합니다. 임상 경험은 투자의 결론이 아니라, 남들보다 좋은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출발점입니다. 그 지점에서 치과의사의 전문성과 투자자의 전문성이 만납니다. 저 역시 치과·의료기기 기업의 법률 이슈를 자문하고 초기기업 투자를 검토하면서 치과산업을 전과 다른 눈으로 보게 됐습니다. 임상의의 꿈을 키우던 시절에는 ‘좋은 제품인가’를 먼저 봤다면, 이제는 ‘이 좋은 제품이 어떻게 좋은 회사로 성장할 수 있을까’를 함께 생각합니다.
그리고 치과의사는 돈만 넣는 투자자에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초기 제품을 써보고 개선점을 제안하며, 개발자가 알기 어려운 진료 현장의 문제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연구와 실증에 참여하거나 필요한 임상가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제품이 다듬어지고 회사가 성장하면 처음 제품을 써본 치과의사가 첫 고객이 되고, 때로는 자문가나 연구자, 교육자와 연자가 됩니다. 돈을 투자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보다 먼저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투자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치과의사들이 모두 벤처투자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주에도 반도체 주식을 살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좋은 기업이라면 치과의사가 반도체에 투자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다음번 HBM과 GPU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번쯤 자신의 진료실을 천천히 둘러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아침부터 사용한 기구와 재료, 모니터에 띄운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쓸 때마다 “이건 왜 이렇게 만들었지”라고 투덜거리는 장비도 있고, 별 기대 없이 샀다가 이제는 없으면 불편한 물건도 있을 것입니다. 그 불편함과 만족감 어딘가에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작은 회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치과의사들은 생각보다 그 회사를 알아볼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수년간의 교육과 수많은 환자, 수없이 반복한 진료를 통해 이미 꽤 값비싼 산업 전문성을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치과의사가 남들보다 먼저 알아볼 수 있는 투자 단서는 증권사 리포트보다 가까운 곳, 오늘도 하루 종일 앉아 있었던 진료실 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