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857번째
인도네시아 선교여행 회상 (하)
<지난호에 이어계속>
다음 선교지인 세마랑은 인도네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대형도시로, 선교사님의 말로는 치안과 안전이 자카르타보다 좋다고 하셨다. “테러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주로 이곳 세마랑에 많이 살고 있어서 자기 집 근처에서는 절대로 테러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대요”라는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세마랑에서 시작된 둘째 날 첫 아침일정은 말을 타고 오르는 고산지대 체험이었다. 마을광장에 버스로 도착하니 그 마을 청년들이 말을 타고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만 100여 마리의 말이 있다고 한다. 한사람씩 말에 올라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다 보니 나는 맨 마지막 말에 올라타게 되었다. 말에 오르고 보니 내 말을 가이드해줄 마부가 없었다. 선교사님이 마부가 한 명 부족하다고 마을청년에게 이야기했지만 무시된 채 그대로 고산지대체험은 진행되었다. 고산지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산을 둘러 만든 길이라 좁고 구불구불하며 울퉁불퉁한데다가 안전 펜스도 없어 말이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그대로 산아래로 구를 것만 같았다. 앞서 가는 말의 마부 손에서 길게 늘어뜨려진 줄 하나에 내 생사가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과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완만하게 구부러진 모퉁이를 돌아 갑자기 시작된 내리막길에서 오른쪽 가슴부근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점점 뻐근한 느낌이 들면서 쥐어짜는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오른쪽 가슴을 열심히 마사지하면서 긴장을 풀어보려고 애썼지만 근육통은 더 심해졌다. 이대로 정상까지 올라간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Please, wait! wait! I’ve got a pain! 앞서 가던 일행들이 놀래서 달려왔고 가슴에 통증이 생겨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애기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겠느냐며 걱정하는 일행들을 보내고 근처에 있는 정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정자에 어지럽게 휘갈겨져있는 낙서들만큼이나 심란했다. 초반에 가슴 경련이 일어나서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해줄 수밖에….
세마랑에서 열리는 인도네시아 목회자세미나 장소에 도착하여 야간진료 준비를 마치고 첫 환자를 맞이했다. 첫 환자는 인도네시아 청년으로 오른쪽 아래 어금니에 남아있는 뿌리를 뽑아달라고 해서 치과용국소마취를 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어렵지 않게 이를 뽑아줬다. 두 번째 환자와 상담을 하고 있는데 방금 전 이를 뽑고 간 환자가 통역을 도와주는 인도네시아 청년에게 뭔가 말하려다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실신한 것이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선생님이 달려오셔서 혈압과 맥박을 체크한 후 혈압이 안정적이어서 다행이라며 당황한 나를 안심시키셨고 목사님은 청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빨리 깨어나기를 기도해주셨다. 잠시 후 청년이 깨어났고 바닥이 차가우니 소파로 옮기자는 해서 들쳐메고 옮기는데 몸이 축 늘어지며 다시 의식을 잃었다. 한순간 안심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금새 어두워졌다. 환자를 소파에 눕히고 몸을 주물러주며 정신을 차리도록 계속 말을 시켰다. 차가운 우유를 먹여보자는 약사님의 말에 찬 우유를 얻어다가 마시게 하니까 그제서야 조금 정신을 차리는 것이었다. 뒤늦게 얘길 듣고 달려온 선교사님이 오시더니 본인이 목회하시는 교회에 다니는 청년인데 원래 몸이 허약한데다가 오늘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질 않아서 쓰러진 것 같다며 이곳 인도네시아에서는 하루에 한 끼 내지 많이 먹어야 두 끼를 먹는다는 얘길 해주셨다. 그제서야 젊은 인도네시아 청년이 쓰러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청년이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간 후 다들 위로의 말들을 내게 건넸지만 오늘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놀란 내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진료하는 내내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내자신에게 수없이 되물었다.
세마랑에서 셋째 날은 선교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를 방문해서 교인들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의료와 이·미용봉사를 시작했다. 무더운 날씨탓에 연식이 꽤 돼보이는 선풍기들은 실력발휘를 못하고 천막아래엔 어제의 해프닝을 모르는지 오늘 따라 이를 뽑아달라는 치과환자가 넘쳐난다.
하루진료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치과장비를 정리하는데 어제 그 인도네시아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어줘서 그리고 오늘 또 만나게 되어서 어찌나 고맙고 반갑던지…. “Are you ok?”라고 웃으며 허그해줬다. 그 청년도 내게 많이 미안했던지 포옹하며 환하게 웃어준다. 그렇게 서로를 안아주고 축복해주며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라는 후회로 가득 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청년은 이제 내게 더 이상 먼 나라 인도네시아 청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1884년 9월 14일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되어 부산항에 도착한 조선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을 시작으로 아펜젤러, 언더우드, 사무엘 모페트, 닥터 홀 등. 생면부지의 땅 조선을 찾아온 많은 선교사들은 이 민족이 겪는 고통을 위로하고 고난을 함께하며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통해서 척박한 이 땅에 많은 복음에 씨앗을 심었고, 지금은 그들이 사랑하며 품었던 조선 땅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 곳곳에 그들이 남긴 수많은 열매들 중 하나이다. 다음은 루비 켄트릭 선교사님의 비문에 남겨져 있는 글이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Ruby Kendric-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살아있다는 건 분명 행복이고 기쁨이다. 살아있음으로 행복과 기쁨을 느끼도록 지구촌 이웃들이 직면한 생존의 문제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유를 떠올리게 한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임용철
선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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