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가격이 9900원으로 끝나는 광고를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된다. 마트나 창고형 할인매장에서 프로모션이라는 미명 하에 덤핑처리를 하기 위해 자주 이용되는 방법이다. 쏟아 붓는다는 뜻의 Dump(ing)이란 다른 물건보다 일부러 싸게 팔아 시장을 점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매력적인 가격에 현혹되어 물건을 구매하게 되고 기업은 이윤 창출과 더불어 인지도 상승에 따른 시장 점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된다. 반면 경쟁에서 밀린 동종업계는 자구책을 찾아 나서려고 상품의 질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좇는데 급급할 것이다. 더 높은 수익을 단기간에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장기적인 비전에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하지만 그들은 선택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포털사이트에 경쟁하듯 깜박거리는 *9만원 임플란트 광고를 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이 광고를 보고 온 환자들에게 *9만원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며 가격 흥정을 하고 있자면 치과의사로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실상 임플란트 한 개를 심는 데 재료비는 20%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치과의사가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2022 카타르 월드컵 TV 중계 화면에 비친 손흥민 선수의 페이스 마스크를 보고 떠오른 단상. 내내 그 페이스 마스크가 눈에 띄었다. 시야를 가릴 것처럼 불편하게 보이는 그 마스크는 그의 안와골절 수술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안와골절. 예전 군의관을 끝내고 근무했던 준종합병원 시절 생각이 났다. TA(교통사고) 환자분들이 더러 있어서 안와골절 외에도 안면부 골절은 그때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증례는 하악 과두부 골절(Condyle neck or High condyle fx.) 2건이었는데, 이때 수술을 도와주러 온 ‘고마운 후배님’ 두 명은 아직도 참 감사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악 과두부 골절 수술을 위해선, 전이개부 접근(귀 앞 절개 및 접근 Preauricular approach) 및 골절된 과두부 정복(골절편 맞춤 Reduction or reposition)시 숙련된 제 1보조자(1st.assist)의 손길이 절실했었기 때문이다. 난 수련의 때 전이개부 접근(Preauricular approach)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해본 적이 없었다. 기회도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 한 번 잡은 기회에서 버벅거리다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아서 話頭란 것을 생각해보셨나요? 화두도 개인적인 화두와 치과의사로서의 화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중용으로 정했습니다. 지금 나이에 重用은 아니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中庸입니다. 치과의사로서의 화두는? 있으신가요? 없으면 같이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도 중보기도를 하면 더 잘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같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속해있는 모임에서 1월 중순의 마지막 날 신년회를 예정하고 있어서 단톡방을 통해 참가여부를 확인하고 있는데, 한 후배가 참가 신청을 하면서 자신의 올해 화두를 參加로 정했다고 합니다.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후배여서 모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자신이 몸담고 있는 모든 모임을 말하는지, 우리 모임을 말하는지 알 수 없으나, 더 활발히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갖고 싶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요즈음 뜨거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는 소통전문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바다에 나아갈 때는 혼자 가지 말라고 합니다. 바다 속에는 볼 것, 먹을 것, 생활에 필요한 자원이 많지만 바다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거친 풍랑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뒤
요즈음 탕후루가 선풍적인 유행이다. 제철 과일에 설탕 코팅 범벅을 해놓은 이 요사스러운 음식은 한눈에 보기에도 단맛을 대가로 치아 건강을 무참히 앗아가는 듯하며, 이렇게 탕후루 유행이 지속된다면 장기적으로 치과 가족 여러분들의 매출에도 약소하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상상을 하곤 한다. 실제로 친구들은 내게 1층에 탕후루 가게를, 2층에 치과 개원을 하는걸 강력히 추천하기도 하며, 단 음식에 대해 자제력이 뛰어난 나 역시 탕후루 한 줄을 게걸스레 비운걸 보면 한참 단걸 좋아할 어린 학생들이 탕후루에 열광하는건 어찌 보면 당연해보이기도 한다.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서늘해지며 붕어빵과 오뎅에 자리를 내주긴 했으나, 여전히 길가엔 탕후루를 베어 물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항상 스마트폰을 들고 있거나, 귀에 에어팟을 꽂고 양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무심하게 길거리를 걸어가던 사람들의 손에 과일이 꽂힌 막대가 들려있는 자못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릴 적 할아버지가 쥐어준 엿가락을 손에 꼭 든 채 혀로 열심히 녹여 먹던 내 어린시절이 무심코 겹쳐 보였다. 시골길 어귀에서 엿장수가 플라스틱팩에 조악하게 포장해 이천
저는 현재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이지만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공학도입니다. 공과대학 학부 시절 로봇과 인공지능 기술에 꾸준한 관심을 두고 5년 정도 관련 연구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 결과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험실에서 논문을 작성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기술 개발에 대한 흥미가 더 컸습니다. 그 가운데 인류의 건강을 증진하는 의학·치의학에 접목되는 로봇과 AI 기술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관련 기술들을 조사하면서 치의학이 기계공학과 밀접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치아는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경조직이기 때문에 기계공학 이론들이 생각보다 많이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기계공학과 선배님들이 치의학 분야에서 성공적인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구강 스캐너, CAD, AI 등의 기술이 치의학을 혁신하고 있는 시대에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해 치의학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후 수강한 많은 교과목 가운데 허경회 교수님의 판독 수업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파노라마 엑스레이에서 비정상 소견을 찾는 과정이 흥미로웠는데 영상의
퇴근길 차 안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저 최진영인데요, 회의를 했는데 이번 베트남에 장훈 선생님 같이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구순구개열 의료봉사에 같이 가자는 전화를 받았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의 수술팀과 함께. 기뻐서 운전 중에 차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코로나와 함께했던 전공의 시절 모든 해외봉사와 해외학회가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대체되어 한번도 가보질 못했었다. 나는 지금 구강악안면외과 수련을 마치고 병무청에서 병역판정전담의사로 대체복무 중이다. 신체검사를 통해 병역 급수 판정을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전공의 때 유별난 하고잡이였던 내가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칼을 못잡게 된 것이다. 3년을 의미있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구강악안면외과 영역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구순구개열 의료봉사에 지원했다. 개인적으로 의료봉사를 가기로 최종 결정하기까지 쉽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봉사 기간이 둘째 아이 출산 직후였기 때문에 아빠로서의 역할을 잠시 놓아야 한다는 것이 가족에게 미안했다. 고민을 하는 찰나 “갔다와, 가서 어른이 돼서 돌아와” 라는 아내의 말에 베트남에 가기로 결심했다. 아내에게 고맙다. 역시 엄마는 위
“엄마”.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울음과 함께 처음 내뱉는 한마디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에게도 나만의 수호신, 우리 엄마가 있다. 이것은 우리 엄마, 혹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5살 때의 일이다. 그날은 엄마의 생신이었다. 5살의 나는 한창 구슬 모으기에 푹 빠져있었다. 엄마께 어떤 선물을 드릴지 고민하던 나는 내가 제일 아끼는 구슬들을 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작은 상자를 가져와 가장 아끼는 구슬들만을 골라서 담았다. 일주일을 기다려 문방구에서 힘들게 구했던 분홍색 구슬을 집어 들었을 때는 순간 ‘이것만 내가 가질까’하고 고민했지만, 큰마음을 먹고 상자에 담았다. 그날 저녁 엄마가 케이크의 촛불을 끄신 후 나는 엄마께 눈을 감아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엄마의 손에 구슬이 담긴 상자를 꼭 쥐어주었다. 눈을 뜬 엄마는 “우와, 우리 딸 선물이 최고인데!”라고 하시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때 5살의 나는 내가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믿었다. 내가 제일 아끼는 구슬들이 엄마에게도 정말 최고의 선물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때의 엄마는 몇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받은 듯
Relay Essay 제2553번째 (2023년 5월 22일자) 게재 어느덧 고희에 이르셨지만, 작은아버지는 나에겐 아직도 조카에게 줄 소년잡지를 들고 골목 어귀를 들어서는 맑고 하얀 청년이다. 삼촌이 갑자기 작은아버지가 됐을 때 모르는 여자에게 삼촌을 뺏겼다는 생각에 큰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작은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와 공감이 있다. 5월 18일 그날의 광주에서, 의과대학 4학년이었던 작은아버지는 고등학교 동문 체육대회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고 계엄군이 온 도시를 유린한 그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의 하루를 보내다 행방불명된 다른 무고한 젊은이들의 가족들처럼, 나의 아버지는 당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동생을 찾으러 자전거를 끌고 나가셨다. 그런 아버지 뒤에 남겨진 식구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어머니가 재직하던 학교에, 작은아버지가 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되어 있다는 연락이 온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정신이 반쯤 나가 달려간 아버지가 마주한 동생은, 췌장이 파열되고 3000cc의 피를 흘린 뒤 수술받은 중상자가 되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무자비한 계엄군의 군홧
2012년 봄, 임상에 처음 나와 근무를 시작했다. 1월과 2월에는 이른바 취업 바람이 불어, 대학 동기 중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취업을 마친 상태였기에 꽤 늦은 취업이었다. 사회생활이라고는 아르바이트도 길게 해본 적이 없었고, 치과 업무를 경험한 것은 오직 임상 실습 때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회생활이었기에 모든 일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인데도 임상에 적용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몫을 다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왜 그렇게 원장님과 선배들 앞에만 서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지 스스로도 답답하기만 했다. 처음이니 누구에게나 어려웠겠으나 동기들보다 늦은 취업이었기에 조급한 마음이 앞섰고 그래서인지 적응하는 것이 유독 나에게만 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그런 1년 차 시절 적응기에 있었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처음 스케일링을 할 때였다. 물론 학교 실습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번 실습도 했고, 입사 후에도 여러 번 트레이닝을 받았던 진료이기에 말이 처음이지 실제로 처음 해보는 진료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어려운지……. 앉은 자세도 자연스럽지 않았고 미러를 이용한 리트렉션이며, 스케일러를 이용하
지난 10월 20일 PFA(Pierre Fauchard Academy)국제치의학 한국회 사무차장으로서 제54회 PFA국제치의학일본부회의 학술회 및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PFA한국회 김현철 회장님과 여러 고문님, 임원진들과 함께 일본 도야마로 출발하였다. 일찍이 지난 5월에 PFA 한국회 총회에 많은 PFA일본회 회원들이 참석하여 함께 강의를 듣고 한강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었기에 처음이지만 이번 일본 총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하였고 도야마라는 새롭고 낯선 도시 또한 처음 방문하는 것이라 이번 여행은 출발 전부터 기대되었다. 한국에서 일본 도야마로 가는 직항 비행 노선은 도야마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알펜루트라는 거대한 설벽을 볼 수 있는 4, 5월에만 일시적으로 운행되고 있어서 PFA한국회원들은 인천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하여 도쿄 하네다 공항을 경유하여 9시간 이상이라는 장시간의 여정을 통해 도야마 공항에 오후 6시 넘어 도착하였다. 이윽고 이어진 PFA일본회 회장 및 임원들이 준비해준 환영회는 아침 일찍 나와 다소 힘들었던 한국회 임원 모두의 피곤함을 잊어버리게 만드는데 충분하였다. 일본회에서 준비해준 환영회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전하고 담소를
2023년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57위로 OECD 국가 중 꼴찌를 기록했다. 그나마 2022년도 59위보다는 2단계 올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최근 신림역 칼부림 사건에서도 피의자는 경찰조사에서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언급했다. 요즘 주위에서 ‘나는 참 행복하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직장에서의 일 때문에 혹은 직장 상사 등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취업이 안 돼서 행복하지 않고, 사업을 하는데 잘 되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하루하루가 경영한다고 힘들고, 환자 보느라고 힘들다. 환자가 많으면 많아서 힘들고, 적으면 적어서 힘들다. 또한 누구는 어디에 집을 샀다더라, 주식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더라 등 누군가와 비교를 하다 보면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불행으로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정적인 단어인 것 같다.) 누군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