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작년 여름의 일이다. 문명과 동떨어져 강원도 산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서 살던 영자라는 소녀는 TV와 한 이동통신업체의 광고에 출연하며 일약 스타가 되었다(초가집을 배경으로 초로의 아버지는 서 있고 그 옆에 쭈그려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소녀를 기억하시겠지요?).
이 스타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상혼(商魂)이 출판계에 손을 뻗어 에세이집도 나오고 ‘영자야, 산으로 돌아가자’라는 시집도 출간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자 본인은 스타가 된지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도시의 사기꾼에게 이용당하고 아버지는 강도에게 살해되는 아픔을 겪고는 출가(出家)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시집은 자본주의의 속성상 잘 팔릴 확률이 높다. 그 시집은 소녀의 진실을 알리는 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좋은 양식으로 남을 것인가? 그래서 이 더운 한여름 밤에 한 등 불을 켜놓고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휴가차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도 다녀와 보지만 정서적으로 재충전할 책을 한 권쯤 보려고 하면 수많은 책 중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난감해질 때가 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상식(?)으로 서점에 들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나마 순진무구한 마음을 어지럽히고 방향성을 잃게 만드는 책들이 칸칸이 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TV나 대중 매체를 통해 알려진 스타의 이름을 내세워 제작하거나 스타 본인이 대중의 인기를 위해 의도적으로 출간하는 이벤트성 책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팔려는 경우가 많다(‘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또한 확인되지 않은 이론을 설파하는 책(‘태고에는 우리가 모르는 인류가 분명히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이단(異端)이었다’ 등의 불확실한 내용들), 좋은 주제이나 한 페이지 분량을 한 권으로 풀어쓴 책(‘80/20 법칙’을 아시나요?) 등은 셀 수 없이 많다.
제목만 멋있게 지어 놓은 시집과 서점의 가장 좋은 목에 전시되어 있는 몇몇 ‘조작된’ 베스트셀러들도 젊은 세대들의 머리를 어지럽히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유명 외국 작품을 들여오면서 작가가 알면 기가 막힐 정도로 엉터리로 번역한 책이 생각보다 많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또한 명성을 얻은 책의 뒤를 이어 나오는 같은 제목의 시원찮은 후속 작품들은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영화 ‘쥬라기 공원’의 세 번째 후속편이 여전히 아이들의 관심을 끄는 것과 같은 원리이겠지만 <부자 아빠>는 그 의미를 이미 알아버렸는데 왜 네 권씩이나 나오는 걸까?).
문학적 수준은 극히 낮으나 공격 본능(적개심)이나 성욕을 자극하며 성실한 독자를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책도 지천으로 널려 있고, 사업상 영업이 잘되기 위하여 내어놓은 책도 사람을 현혹시킨다(성형외과 전문의의 ‘미인 만들기’ 류의 책 등이 대표적이겠다).
책에 대한 선호도도 세대별로 점점 차이가 커지나 보다. 국내 대학생들의 독서 성향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장르별 인기 순위는 ‘무협지’, 인터넷을 통해 올라오는 ‘판타지 소설’, ‘엽기 소설’ 등이 주를 이루고 ‘고전(古典)이라 일컫는 소설’, ‘시집’ 등은 거의 하위에 있었다.
주위에 진실로 글을 쓰는 작가의 책들이 아무 배려 없이 다른 책들 밑에 ‘눌려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는 한 교수님의 말씀이 가슴에 걸린다.
우리 세대는 ‘눌려 있는 지성’을 어느 만큼이나 배려하고 있는가? 도대체 관심이라도 가져보는 숨은 독자가 많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문학 작품의 선호도에 있어서 ‘진정성’과 ‘헌신’ 보다는 ‘가벼움’과 ‘부담 없음’을 선호하는 쪽으로 독서의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는 느낌이지만, 마음의 양식에 이르지 않더라도 책을 읽음으로써 내 영혼의 ‘불필요한 흔들림’이 없도록 책을 고르는 일에 더 각별한 주의를 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나 보다.
이 한여름에 어김없이 찾아온 열대야는 시원한 수박 한 쪽과 함께 어떤 종류의 책읽기로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까?
(orthodani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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