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 안중근 의사 추모 및 한일 친선 교류회 참석

  • 등록 2014.10.07 11: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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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제1968번째

일본 센다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구리하라(栗原)에는 신문 기자출신의 사이또 다이껜 주지가 관리하는 대림사란 절이 있다. 그곳에는 안중근 의사와 치바 도시치의 위패와 기념비가 있다. 대림사에서는 81년부터 해마다 9월이 오면 이들에 대한 추모예식이 계속 행해지고 있다. 올해는 34회로 안의사 순국 104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9월 13일부터 17일까지 한일 친선 교류회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안의사는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분이다. 일본 헌병 상등병이었던 치바 도시치는 안의사 전담 간수로서 5개월간 수감생활을 같이 하면서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그분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화되어 마지막 날 형장으로 끌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경례까지 올렸다고 한다. 수감 중 안의사는 동양평화론 등을 집필했고 또 많은 유묵을 남겼다.
 
보통 옥중 육필을 받은 사람들은 형무소장, 간수, 형사, 판사, 검찰관, 교화승 등 일인들이었다. 치바도 평소에 유묵을 하나 얻고 싶어 했었다. 사형집행 전날 “내일 오전에 형 집행이 있을 것 같다”는 정보를 흘려줬기 때문이었는지 안의사는 원하는 유묵을 써 줄 터이니 화선지를 준비해오라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종이가 없어 명주천을 가져다 줬고 거기에 마지막 유묵인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란 유명한 글을 남기게 됐다.
이는 유일하게 명주천에 남긴 유묵이다. 이 유묵은 유가족을 비롯한 대림사 지역주민 및 신도회가 주축이 되어 대형 비석에 새겨 대림사 마당 전면에 세웠다.

치바가 퇴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안의사의 사진과 유묵을 소중히 모시면서 조석으로 안의사의 명복을 빌었고 그의 사후에는 부인이 대신 예를 올렸다고 한다. 자식이 없어 조카 미우라 구리코를 양녀로 삼아 이 일을 이어가게 했고 79년 안의사 탄신 100주년 되는 해에 미우라가 한국 안중근 기념관에 기증한 바 있다.

 안의사의 생애와 사상을 아는 일본 사람들은 그가 위대한 인물임을 이해하고 존경하며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이나 논문도 상당수 있다. 유묵 3점이 보관된 교토의 류코쿠대학에는 사회과학연구소 부속으로 안중근동양평화연구센터를 두고 역사적, 경제적 및 문화적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대림사는 주지 한사람이 선친의 대를 이어 딸과 함께 운영하는 절로서 치바의 부인이 다니던 절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치바 부부의 묘와 석비와 위패가 그리고 안중근의 위패와 유묵비가 세워져 두 사람 간의 우정을 기리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대림사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에 치바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고 그 집 바로 옆에는 ‘청운사’ 라는 절이 있다. 구리하라에는 지역 명사, 대학교수, 시 및 현의원 등으로 구성된 사담회라는 조직이 있는데 그 단체에서는 안중근과 치바 도시치의 위폐는 생가가 있는 곳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해 두 절에서 같은 행사가 날자만 달리하여 시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시골 마을의 절들이 이로 인해 방문객도 늘어나고 유명해지고 있다고 한다. 약 7년 전쯤  숭모회 안용석 이사가 현지를 여행하다 태풍을 만나 이동이 어려워져서 가까운 곳에 쉬어 갈만한 조용한 암자가 하나 있다고 하여 가 보았더니 우연히 들어선 그 곳에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안중근의사 유묵비가 서 있었고 치바거사와 안의사를 추모하는 현장임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과의 관계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다소 냉각된 한일관계 때문에 한국관광객의 수는 상당히 줄었다고 한다. 사실 한일 관계는 친선을 잘 유지하면서 잘 살고 있고 일본국민들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데 지도자들이 정권유지와 인기를 얻기 위해 야스쿠니, 독도 등을 이용해 국민을 자극하는 제스처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섬이 1000여개나 되고 다께시마가 무려 30개나 이돼 일본인들은 원래 독도를 몰랐다고 한다. 이때는 이미 1900년 10월 25일자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한국영토임이 공표된 시점이었다. 한 현의원 출마자가 선거용으로 일본 어부 나카이 요사브로에게 더 멀리 더 넓은 해역에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특혜를 주겠다고 정부에 독도 편입청원을 유인했고 일본정부는 독도를 죽도라고 명명하고 1905년 1월 28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거짓말도 하나의 방법이란 일본 속담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부분이다.

특별히 이번 행사후 여정에 윤봉길의사 암장적비를 찾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윤의사가 상해 홍구공원 의거이후 가나가와에 잡혀와 총살된 후 나가노 시영 노다산 묘지로 올라가는 샛길에 묻어 사람들에게 짓밟혀지도록 했었다. 지금은 재일한인들이 새로 세운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일인들은 천황을 위해 극악무도한 일을 너무 많이 했다. 일본의 기미가요는 “긴 세월 아주 긴 세월 강가의 돌에 이끼 낄 때까지 우리 천황 오래 살기 바랍니다”라는 뜻이란다. 이것은 국가라고 할 수는 없는 천황가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일본학자들이 지난 100년을 근거로 정리한 대표적 일본국민성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도주의라는 것이고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악용한 군부, 관료에 의해 국민은 눈 뜬 장님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영웅을 죽인 안의사를 일본에서는 추모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일본 지도자들과 개인에서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안의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발표된 연구논문이나 서적도 상당수 있다. 교토에 있는 류코쿠대학에는 사회과학연구소 부속 안중근 동양평화 연구팀이 구성되어 있고 유묵이 3점이나 보관되어 있다.

안의사는 1910년 3월 26일 형 집행 당일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란 유명한 글을  남겼다. 이 유묵의 내용은 군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爲國獻身 國民本分이란 의미로  넓게 활용되어야 마땅하다는 의견을 이에 제안하는 바이다.
 
안의사의 어머니는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파페라 가수 듀오아임은 이를 근거로 작곡 작사한 노래를 한일친선 교류회장에서 불러 눈물을 복받치게 하는 큰 감동을 주었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단원들과 주관한 안중근 기념관 이혜균 차장의 수고에 감사와 경의를 보내면서 이글을 마친다.



김영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안중근 홍보대사



김영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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